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공(空)으로 가는 길 / 백임현

부흐고비 2019. 12. 7. 10:23

공(空)으로 가는 길 / 백임현


싸움도 관심이다. 노인이 되면 싸울 일이 없다. 노인부부가 살면 더구나 그렇다. 아이들이 결혼해서 각기 떠나간 후 두 사람만 살아 온 세월이 어언 이 십 여년을 헤아린다. 특별히 금슬이 좋은 편은 아니나 나쁠 것도 없어서 평생 동안 크게 싸워 본 적 없이 살아왔다. 소소한 말다툼이야 있었겠지만 그건 싸움이랄 것도 없는 몇 마디 가벼운 말씨름 정도였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최근에 와서 사소한 일로 충돌이 잦다. 남편과 사별한 어느 칠십대의 노인이 남편 생전에 서로 싸웠던 그 때가 제일 그립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싸움조차 애정이었던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즘 전에 없이 어긋남이 잦은 것도 좋게 생각하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야 할까. 살아 있다는 증표라고 해야 할까. 삶이 있기에 다툼도 있고 갈등도 있는 것인가 좋게 생각하려 애 쓴다.

성격이 내성적인 남편은 조용한 것을 좋아 한다. 식사할 때도 숨소리는커녕 젓가락 부딪는 소리 한 번 나지 않아서 새로 온 며늘애가 아버님은 꼭 새 색시처럼 진지를 드신다고 말할 정도다. TV를 볼 때도 음량을 최대한도로 줄여 아나운서의 빠른 말이나 드라마에서 소곤대는 말소리는 정신 차리고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TV에 흥미를 잃어 우리 집 TV는 남편의 전유물이 되었고 어느 틈에 리모컨은 남편의 지배하에 있게 되어 나에게는 채널권도 음량조절권도 없다. 어쩌다 내가 음량을 높이면 청각에 문제가 있는가보다고 흉을 본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화할 때도 내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지면 음성을 낮추라고 마치 수화를 하듯이 손짓을 한다. 나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시끄러운 성격도 아닌데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만 살아 썰렁한 집안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우리가 무슨 도피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싶어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정도는 내가 참으면 되니까 약간 불만스럽기는 해도 크게 문제 될 것까진 없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우리는 사후(死後)의 문제를 놓고 종종 대립 한다. 살아 있는 현실 문제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원만하게 지내다가도 죽은 후에 장례 절차를 놓고 대립하게 된다. 그것은 매장을 원하는 남편, 수목장이 좋다는 나의 의사가 완강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가 이제 노령이니 이런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이 되어 있다. 좋게 의논이 되어도 서글픈 문제인데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기분이 상하니 쓸쓸하다. 언제인가 한 번 우리의 이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아니, 사후의 문제를 가지고 두 분이 지금 왜들 이러세요. 그런 일은 저희들이 알아서 합니다.”
하긴 죽으면 세상일에 관여할 수 없으니 우리의 뜻대로 될지 어떨지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남편은 전통적인 의식으로 선산에 매장할 것을 원한다. 벌써 자리까지 봐 둔 형편이다. 고인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고 선산의 유택으로 모시는 것. 그것은 선조로 부터 이어 온 우리의 아름다운 장례문화다. 지나다가 잘 가꿔진 묘소를 보면 조상을 받드는 자손들의 효심이 대견스럽고 저절로 가문의 기품을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장례방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 선산에도 집안이 형편에 따라 납골묘를 지어 고인을 모시고 봉분 없는 평토에 비석을 세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 화장을 싫어하는 그의 심중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성인도 시속을 따르랬다고 우리의 의식도 변천하는 시대의 흐름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도봉산 둘레길을 가다 보면 잡초가 무성한 산등성이 한 쪽에 폐허처럼 방치된 분묘들을 볼 수 있다. 거의 밋밋하게 평지처럼 가라앉은 언덕이 묘소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 풍우에 마모된 초라한 비석들이다. 희미하게 남은 표석에는 ‘바오로’ ‘카타리나’ ‘마르샤’등 세례명이 적혀있다. 대개 오륙십년 대 매장된 천주교인들의 묘소인 듯싶다. 돌보는 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구나.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도연명의 만가시(輓歌詩) 한 구절을 외우게 된다.

死去何所道 죽어버리면 무엇을 말하겠는가
託體同山阿 몸을 맡겨 산언덕과 같아지는 것을.

나는 이 묘소들을 보면 그것이 먼 훗날 우리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언짢다. 그래서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
“이봐요, 돌볼 사람 없으면 백년도 못 되서 저렇게 폐총(廢塚)이 되고 말아요. 우리는 손자도 없는데 누가 우리 묘소를 돌볼 건데...... 합리적으로 현실을 생각합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는 안색을 바꾸며 선산이니까 집안의 후손들이 돌본다면서 완강하게 화장(火葬)을 반대 한다. 그러나 자식도 못 믿는 세상에 까마득한 세월 후 얼굴도 모르는 후손들의 손길을 어찌 바란단 말인가.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냉철해지자고 나는 말 한다.

나는 그 전부터 수목장을 주장해 오고 있다. 선산의 잘 생긴 어느 나무아래나 양지 바른 언덕에 묻혀 흙이 되어 나무를 키우고 해마다 봄풀로 돋아나 한 철을 살다가 겨울에는 잠자고 이듬해 다시 파랗게 소생하는 생명으로 이어지고 싶은 것이다. 아니 완전히 자연이고 싶은 것이다. 사람, 흙, 초목이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소멸하였으되 다시 환원되는 생명, 흙 속에 내가 있고 흙이 키우는 초목 속에 내가 있다면 비록 형체는 달라졌어도 생명의 원천은 이어지고 있으니 내가 어찌 죽었다고 할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글 쓰는 사람 아니랄까봐 비현실적인 감상을 한다’고 남편은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누가 더 현실적인가. 부부가 죽어서도 같이 가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러다간 두 사람 가는 길이 다를 것 같아 쓸쓸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다. 우리 부부도 이제 돌아갈 때가 머지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몸, 매장이면 어떻고 화장이면 어떤가. 싸움도 관심이라지만 사후의 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집착이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생명은 흙으로, 자연으로, 끝내는 공(空)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결국 공(空)으로 돌아가는 길고 긴 여정이 아닐까. 금강경의 마지막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서도 일체 현상계의 생멸이 덧없는 환상임을 노래하고 있다. 무엇을 다투고 무엇을 갈등하랴. 삶과 죽음은 하나인 것을......

一切有爲法 일체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如夢幻泡影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如露亦如電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應作如是觀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의 경의선 / 백임현  (0) 2019.12.07
어떤 제자 / 백임현  (0) 2019.12.07
청에 젖다 / 안희옥  (0) 2019.12.06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0) 2019.12.06
각도를 풀다 / 이혜경  (0) 2019.12.0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