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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떤 제자 / 백임현

부흐고비 2019. 12. 7. 10:24

어떤 제자 / 백임현


여러 해 전 수유리 주택가에 살 때 이야기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여러 가지 채소를 실은 트럭이 골목마다 누비고 다니면서 행상을 했다. 우리 집 앞길은 골목이라기엔 조금 넓은 6미터 도로였다. 그래서 온갖 행상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시장이 조금 멀리 있어 집 앞에서 찬거리를 장만하는 것이 손쉬워 자연히 골목안 사람들은 채소트럭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채소트럭이 여러 가지 채소를 열거하며 골목 안에 들어서면 기척 없이 조용하던 동네는 잠을 깬 듯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 집 저 집에서 아낙네들이 차 앞으로 몰려와 왁자지껄 소란이 벌어졌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여자들이 모이면 시끄럽기 마련인 것은 이곳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한 푼이라도 싸게 사겠다고 흥정하는 소리, 물건이 좋지 않다고 타박하는 소리, 만난 김에 이웃 간의 소식을 묻고 대답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웃음소리들로 떠들썩하다. 무료한 한낮의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이런 풍경은 옛날 시골 마을 우물가의 정경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움이 있어서 나는 별로 살 것이 없어도 트럭 앞에 나가곤 하였다.

우리 골목을 몇 년째 찾아오는 채소장수는 이십대 후반의 착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영리해보이지도 않고 순하고 어질게 생겨서 저런 사람이 무슨 장사를 해서 돈을 벌까 싶었지만 수다스러운 아줌마들의 온갖 투정과 잔소리를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아주면서 인심을 얻으며 팔건 다 팔았다. 그 성품 덕분에 하루에도 여러 차례 장사가 지나가지만 사람들은 기다렸다가 이 젊은이의 것을 팔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그 트럭 앞을 지나는데 그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유, 선생님 댁이 여기세요? 그렇게 지나다녔는데 정신없이 다니느라고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뜻밖에도 제자였던 것이다.

“나도 너를 오늘 처음 봤구나. 장사 잘 한다구 들어왔다. 열심히 해봐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는 반갑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남편은 얼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이 강북 일대에서 평생 교직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집 밖을 나서면 제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지물포에서도 만나고, 슈퍼에서도 마주치게 되고 유리가게에서도 반가운 인사를 받곤 한다. 그들은 저마다 생활전선에서 성실하게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소시민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리처럼 강북에 남아 소박하게 살고 있는 제자들은 명절 때나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찾아와 훈훈한 사제지간의 정리를 되새기게 하였다.

남편과 인사를 하고부터 그 젊은이는 우리에게 각별하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같은 값에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했고 어느 때는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고 싱싱한 생선을 주고 가기도 했다. 바쁠 때는 그의 어머니도 장사를 거들기 위해 같이 다닐 때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극진했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말라고 했던 옛말 그대로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것은 우리였다. 물건을 팔아주자니 그에게 폐가 되는 것 같고 안 팔아 주자니 야박하게 거래를 끊는 것 같고…….

이렇게 난처한 시간이 한동안 지났을 때, 뜻밖에 새로운 계기가 생기게 되었다. 그 젊은이가 결혼을 해서 새 신부와 같이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젊은 아낙은 예쁘고 영리하고 엽엽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꽃 같은 새댁이 남편 따라 행상을 하려고 나선 것도 보통 기특한 일이 아니라며 신랑이 마음씨가 좋아 장가를 잘 들었다고 골목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든 어머니와 다닐 때보다 신랑의 얼굴도 환해 보였고 두 사람의 모습은 비록 트럭 위에서였지만 한 쌍의 원앙같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순박하고 친절한 신랑을 제쳐 놓고 여자가 나서서 물건을 팔기 시작하고부터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새댁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게 소문나기 시작했다. 여자가 지나치게 약고 이악하다는 것이다. 조금 비싼 듯해도 야채가 신선해서 팔아 주었던 것인데 다른데 보다 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여자는 어느 틈에 시들시들한 재고품을 끼어 팔기도 했다. 보통 단골이 아닌 우리에게까지 여자는 안하무인이었고 몇 번인가 속여 팔고 있었다. 곁에서 그렇게 하는 색시의 꼴을 보면서 순해 터진 신랑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어째서 기본적인 상도의까지 외면하고 이처럼 영악한 것인가. 사람들이 처음 몇 번은 속을 수 있지만 계속 이런 술수에 속을 만큼 소비자도 어리석지는 않다. 단골을 잃어 장사가 잘 안되니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골목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영악해야 되는 세상이지만 그 제자는 아무래도 장가를 잘 못 간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린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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