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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을 헤아리다 / 남홍숙

부흐고비 2019. 12. 7. 21:50

꽃을 헤아리다 / 남홍숙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피어나는 건 눈부시다.

바위틈 작은 꽃이든 허공을 채우는 꽃나무든 소생되는 질감은 동일하게 귀중하다. 여러 꽃 중에 나와 잇댄 스토리를 지닌 것은, 바싹 마른 가지라도 생의 박동이 감지된다.

이 나라 하이스쿨은 오후 세 시에 수업을 파한다. 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 앞 이름 모를 나무아래서 아이를 기다리곤 했다. 수요일엔 두 시부터 체육시간이라 아이가 뛰어 노는 것을 보기위해 테니스코트 앞 그 나무 밑에 가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렸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 그럴까. 당시 부풀어 오던 내면의 파동을 나의 언어로는 소상히 묘사할 수가 없다. 헨델머리의 백인 아이로부터 토스된 공을 아이가 받아 네트 위로 넘길 때, 나는 꽃 이파리가 떨어지듯 손뼉을 쳤다. 어미의 근성이 전해졌는지 아이의 근육에 심줄이 더 팽팽해졌다.

브리즈번에 온 그해 구월의 첫 봄이었다. 그 나무가 꼭대기서부터 하나 둘 꽃을 달기 시작했다. 현호색을 닮은 초롱꽃이 촘촘한 밀도로 피어나고 있었다. 빛 속 꽃가지가 일렁일 때마다 연보랏빛은 더 눈부셨다. 하늘과 태양의 색조가 융합된, 이 색상과 맞닥뜨린 순간 이 꽃이 보라색의 완성이라 생각했다. 몽환의 빛깔에 정신이 아득했다. 처음 본 크레용을 꿈꾸듯 만지작대던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들렌을 먹으며 맛보았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의 행복감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고삐를 쥔 시간이 나무의 발치에 꽃 멍석 하나 만들었고, 꽃잎은 내 손바닥에서 제 향기를 내 몸속으로 들여보냈다. 아카시아같이 진하지도 장미향처럼 순하지도 않은 향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꽃에도 사연이 있다. 구월에서 시월의 시간을 다 건널 때까지, 봄의 파수꾼인 양 보랏빛 꽃 항아리를 허공에 띄운 이 꽃이 대학생들에겐 징크스다. 나무 밑을 지나던 학생의 몸 어딘가에 꽃잎을 맞으면 성적이 떨어진다는 악운의 꽃이란다. 아마도 이 꽃의 개화시기가 시험기간과 겹치니까 자녀들이 감성에만 빠지는 걸 저어한 어느 학부모의 발상일 거다. 수업료 전액을 대출금으로 내고 취업이 된 후, 론을 갚는 이곳 대학생이 받는 호혜적 교육시스템으로 봐서, 그 말을 창안한 사람은 이 나라 학부모는 아닐 터, 나처럼 거액을 지불하는 해외유학생의 부모가 지어낸 꽃말이리라.

떨어지는 건 때로 비참하다. 떨어지는 숫자는 차갑고 결연하며 위압적이다. 유학생의 성적이 F로 떨어지면 한 과목당 삼천불 가량의 재 수강료를 감내해야한다. 우리 세 아이들에게 그 불상사는 없었더라도, 숫자가 떨어지는 건 내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700원대이던 환율에 돛을 단 듯, 1200원까지 올라갔을 땐 내 온몸으로 노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처음의 낮은 환율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를 기다리던 나무 아래서… 때론 책을 읽다가 숫자를 헤아려야 했다. 걸음마를 익힌 아기처럼 이제야 백인 아이들과 정을 붙이고 친구가 되었는데, 겨우 말이 트이고 저리도 신나게 공을 잘 치는데 중도에 유학길이 막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시간이 꽃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꽃잎을 말리듯이, 내 숫자의 잔고도 떨어지거나 비워져서 말라버릴까 두려웠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도 숫자 앞에서는 거추장스런 위선의 말을 하지 않았다. 숫자를 지닌 어조는 나무가 한 곳에만 정박해 있는 일만큼 엄중했다. 누군가 내게, 유학비는 충분하니, 라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자존심이었을까. 나도 내 숫자의 허약한 속내를 여는 일은 없었다. 다만 내게서 숫자가 떨어지는 걸 막았다. 세 아이들의 학비와 식비 외에 다른 소비는 최소화 하는 일이 숫자를 떨어뜨리지 않는 과제였다. 어느 날 아이가 나의 지인에게 ‘우리 엄마는 쓰레기도 반액세일하면 살 거예요.’ 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도 있었다.

내가 숫자를 아낄 때, 시간도 꽃을 아끼며 떨어뜨렸다. 보라색 초롱꽃잎이 제 몸을 비틀어 허공에 나부끼다 떨어졌다. 나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꽃과 공감대가 형성된 나는 꽃의 깊이를 재기위해 꽃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꽃 속에 개미와 벌레들이 오물거렸다. 내 손으로 꽃과 벌레를 분리시켜 주었다. 타자의 근질거림을 덜어주는 건, 그의 속내를 헤아려주는 거니까.

그런데 꽃잎 지는 비애를 헤아리다보니, 내 속에 든 비통한 사안들이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긍정적 기이현상이 일어났다. 시나브로 보라색은 나의 색깔이 되어 있었다. 이지적이고 따스하고 빛나는 색깔로 다가왔다. 이 꽃의 색깔이 ‘슬픔의 색’이라고 동의하기에는 내게 설득력이 없었다. ‘악운의 꽃’도 아니었다. 나와 함께 내 아이를 기다려주던 꽃의 몸짓이 그저 아름답고 고맙기만 했다. 한때 나는 보라색 이불, 보라색 스카프…를 사들이면서 자카랜다, 이 꽃을 떠올렸다.

번다버그에 온 후에도, 지난 오년 간 아이를 꿈꾸듯 헤아려보던 ‘인도루필리 하이스쿨’의 그 나무를 여전히 헤아린다. 그리고 아이가 남기고 간 꽃잎 같은 메모장을 펼쳐 만진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밤에 들려오는 자장노래 어떤가요. (oh yeah)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 . ♪♩
- 벚꽃 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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