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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삽화 / 정태헌

부흐고비 2019. 12. 8. 10:56

삽화 / 정태헌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연달아 울려도 받는 이는 없다. 안에선 전국노래자랑이 티브이에서 한창이고, 밖에선 이동 트럭이 지나가며 확성기를 외쳐댄다. 벨소리는 제풀에 지쳐 꺼지고 확성기 소리는 멀리 사라진다. 입구 맞은편 벽엔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오래된 목판이 걸려 있다.

후미진 곳에 있는 오래된 이발관이다. 좁지만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오가며 커피도 마시고 말 대접도 받는다. 반은 손님이고 반은 과객이랄까. 장년 사내가 총총걸음으로 들어선다. 눈빛으로 보아 휴대폰 주인인 모양이다. 이발사는 서랍 속에 간직해둔 휴대폰을 꺼내 준다. 휴대폰 주인은 이발사의 등을 치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간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가 들어선다. 이발사가 반갑게 맞이하자 노인네는 소파에 앉는다. 이발 의자는 두 개인데 하나는 내가 앉아 이발 중이고, 곁 의자는 다른 노인네가 누운 채 면도를 하고 있다. 면도는 이발사의 아내가 맡고 있는데 공짜요, 이발 값은 수년째 칠천 원이다. 백발의 노인네는 면도하고 있는 노인네를 향하여 대뜸 한 마디 내뱉는다.

장가야, 오늘 무슨 일 있느냐. 늙마에 면도하고 있다고 농을 던진다. 얼굴에 거품을 잔뜩 묻힌 장 씨는 면도날이 얼굴을 달리는 판이니 한 마디 못하고 끙끙 앓는다. 이어 또 한 마디. 장가야, 그저께도 부리나케 어디를 가던데, 새장가라도 가려는 거여? 장 씨는 목울대만 오르락내리락할 뿐이다. 이발사 마누라가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손길을 멈추고 짐짓 거든다. 아니 어르신, 정말 그러시는 거예요? 장 씨는 아니라고 손사래 치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만다. 황가야, 그 주둥이 닥쳐라. 아니 멀쩡한 사람 놓고 흠을 내느냐 이놈아. 두 노인네는 칠순을 넘긴 연치인데 막역한 사이인 모양이다.

황가야 형님 먼저 가신다, 천천히 오너라. 이발과 면도를 마친 장 씨는 무에 바쁜지 지팡이를 들고 휭 문밖으로 나선다. 잘 모시세요. 뭘 모시라는 것인지 박 씨가 허리 굽혀 장 씨를 배웅한다. 텔레비전에선 아직도 노래자랑이 한창이다. 트로트 여가수가 허리를 흔들어대며 늘어지게 노래를 재껴 부른다. 이발사는 황 씨에게 말을 건넨다. 갈수록 젊어지십니다그려, 어르신. 그려? 빈말이라도 고마우이. 저녁에 탁주 한 사발 사지. 오늘 아침 며느리한테 용돈 받았거든. 그나저나 이 집 커피는 달착지근하여 맛이 그만이란 말이야. 황 씨의 말에 이발사 김 씨는 너털웃음을 뺀다.

갑자기 장 씨가 다시 이발관으로 들어선다. 그러더니 지팡이를 흔들며, 황가야 지팡이를 왜 내 것과 비슷한 걸 마련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느냐 이놈아. 아무래도 손잡이가 마뜩찮아 살펴보니 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벽에 기대 놓은 자신의 지팡이를 다시 들고 나선다. 이에 놓칠세라 황 씨는 장 씨의 등 뒤에 대고, 네 이놈 군청 다니는 둘째 놈이 돈 들여 사다준 지팡이를 감히 욕심을 내? 가다가 속이 켕겨 돌아와 너스레를 떠느냐. 정 욕심나면 말해라 이놈아. 장 씨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제 지팡이를 찾아들고 밖으로 나선다. 이발사 김 씨는 장 씨에게, 길 조심해서 천천히 살펴 가십시오, 하고 예의를 차린다. 장 씨 또한 말 대접이 되돌아온다. 염려 말게 달려가지 않을 테니까. 대신 다리가 부실한 저 황가 놈이나 잘 부축해 보내시게. 나는 일없네. 허어, 할 일이 많은데 땅거미가 지네그려.

장 씨가 문밖으로 나서자 황 씨는 면도사에게 묻는다. 박 씨, 아까 장가에게 뭘 모시라는 건가? 오늘이 장 씨 어르신 선친 기일이랍니다요. 흐음 그려? 황 씨는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들이쉰다. 정월 보름께니 그렇겠구먼. 놓칠 뻔했네, 헌작은 못할지라도 제주祭酒나 한 병 보내야겠구먼. 노년의 우정은 격의 없는 농을 곁들이면 수명이 길어진다더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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