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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몰락하지 않는다 / 문현주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달이 진다 달이 진다’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1993년에 발표된, 말하자면 이미 지난 세기의 노래다. 달이 어쩌구 하는 후렴 부분을 길거리 음악으로 흘려들었던 이 노래가 재생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어떤 잘생긴 배우가 〈달의 몰락〉이란 독특한 제목의 이 노래를 부르는데 호소력이 남달랐다.

전주를 듣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손가락과 발가락을 까딱이게 되는 이 곡은 경쾌하다. ‘달’도 ‘몰락’도 그 어느 쪽도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그 다음 박자에서 팔짝 뛰어오르는 기분, 첫 박이 쉼표로 시작되는 묘미다. 음악용어로는 씽커페이션(syncopation). 강, 약, 중강, 약의 일반적 리듬 대신에 약박 자리에 강박이 들어가는 것으로 번역하자면 엇박자, 당김음이다.

인간이라면 감성과 근육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감각을 겨냥했다고나 할까. 몸이 먼저 깨어나고 그 다음에 가사가 들리고 그 다음에 리듬과 가사가 연결된다. 읏 따따 읏따읏따, 쉼표를 조금씩 넣어 주며 밀고 당긴다. 살아 있다! 노래 부르는 남자가 노래 듣는 내가, 모두가 꿈틀댄다.

노래는 일단 들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리듬, 음악의 영역은 유튜브의 몫으로 돌리고 여기에서는 가사를 곱씹을 수밖에.(youtube에서 김현철 〈달의 몰락〉을 검색하면 바로 뜬다.)

(달이 진다 달이 진다 달이 진다 달이 진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그녀는 나에게 말했지/탐스럽고 이쁜 저 이쁜 달//나랑 매일 만날 때에도/그녀는 나에게 말했어/탐스럽고 이쁜 달이 좋아//나를 무참히 차 버릴 때도/그녀는 나에게 말했지/탐스럽고 이쁜 저 이쁜 달/나랑 완전히 끝난 후에도/ 누군가에게 말하겠지/탐스럽고 이쁜 달이 좋아

후렴-그녀가 좋아하던 저 달이/그녀가 사랑하던 저 달이/지네 달이 몰락하고 있네

(나도 그녀를 잊을 수 있다)

-김현철 작곡·작사, 〈달의 몰락〉 전문

달은 언제 지는가. 달은 하루에 12시간을 떠 있는다 하니, 18시에 태동하기 시작한 보름달이라면 다음날 06시에 진다. 달 보고 소원을 빈다는 말은 흔히 듣지만 달이 지는 것을 기다린다거나 본다거나 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남자는 달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간을 기다려 그 달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란다. 설정부터 흔치 않다. 끌린다. 이 남자, 궁금하다.

남자는 달을 보며 주문처럼 ‘달이 진다’를 외운다. 생각은 그녀에게 머물러 있는데도 말이다. 처음 만났던 그녀, 매일 만났던 그녀, 지금은 가 버린 그녀를 잇달아 떠올린다. 딴 놈에게도 “탐스럽고 이쁜 달이 좋아”라 말할 그녀를 예상하며 속 터져 한다. 남자의 ‘달이 진다’는 그녀의 ‘달이 좋아’에 대항하는 말로 자신을 차 버린 그녀를 부정하고픈 욕구를 대변하는 우회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왜 “탐스러운 이쁜 달이 좋아”라고 한 것일까. 그것도 매일.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가지고 싶을 때 탐하거나 탐낸다. ‘탐스럽다’는 칭찬을 넘어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더한 것이다. 이쁜 것을 향한 마음이니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겠다. 올드한 버전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은 별을 따다 주세요, 따다 주리다, 하면서 사랑을 확인한다. 그녀는 별 대신 달을 넣은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달은 소유를 갈망하는 대상에서 나아가 사랑을 확인하는 대상으로 확대된다. 심지어 천년만년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런 기대가 가능하다. 영원에 대한 동경, 뜨고 지며 순환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존재에 대한 동경을 ‘달이 좋아’라는 말로 내비쳤다 할 수도 있다.

달은 또 얼마나 친근한가. 해는 오로지 해질녘 기운 빠져 시름시름할 때만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달은 아니다. 낮게도 높게도, 크게도 작게도 언제든 볼 수 있다. 쌩쌩한 달, 시큰둥한 달을 모두 호흡할 수 있는 것이다. 달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정점에서 사멸로 가는 그 모든 과정을 보여주기에 인생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보자면 달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대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남자는 달만 보면 그녀를 떠올린다. 이미 그녀는 달이다.

남자가 노래하는 상황은 절대 유쾌하지 않다. 반복되는 동일음에 가사를 담아 차분한 척하지만 가사 속을 들여다보면 엄청 열 받았음이 느껴진다. 열 받고 침울한 상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리듬은 신난다. 이 조합은 참신하고 유연하다. 현실적 상황과 이상적 지향을 모두 포함하는 반어적 집합체가 주는 매력이라고나 할까. 남자의 사랑과 그녀의 사랑은 서로 마음 맞지 않는 따로 노는 엇박자였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밀고 당기기가 필요했다. 리듬의 어그러짐을 통해 리듬을 살리는 묘한 융합이 시작됐고, 상반된 것이 주는 감각적 쾌감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 세기에 이 노래를 듣지 않은 것도 지금 이 노래를 듣는 것도, 모두 이 발랄하고 원초적인 감각 때문일지 모른다. 클래식의 엄숙주의에 빠져 있던 파릇파릇한 나는 유치했다. 가사를 듣기도 전에 감각이 아우성치는 노래는 품위가 떨어진다거나 퇴폐적이란 선입견이 있었으니 말이다.

〈달의 몰락〉 같은 가사를 차분히 노래했다면? 남자는 노래를 부르다가 나는 노래를 듣다가 지루하고 비참해져 숨이 막혔을 것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일지도 즐겁게 살아 숨 쉬는 리듬 속에 담아 쿨하게 넘어가야 한다. 감각적인 리듬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다가 ‘인생 다 그래’라며 웃자는 것이다. 사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인생人生인가? 신생神生이지.

남자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그녀를 잊을 수 있다”라고 중얼거린다. ‘달이 진다’가 감각적 리듬의 씽커페이션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면, 이 마지막 독백은 음악적, 감성적 카타르시스를 마치고 난 후의 출구다.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가벼운 주문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가 좀 걸린다. 정말 가능할까.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씽커페이션처럼 다시 뜨고 지는 달처럼, 그녀가 계속 머릿속에 마음속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아닐지. 불현듯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겠다는 화자가 보이는 것은 나만의 환영幻影일까. 그렇지만 뭐, 괜찮다. 남자 역시 신생神生을 사는 것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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