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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간에 대하여 / 정태헌

부흐고비 2019. 12. 8. 10:57

시간에 대하여 / 정태헌


뒤엉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순간마다 흘러가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되짚으면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머뭇거리며 지나가며, 과거는 영원히 정지한 채 침묵 속에 맴돌 뿐이다. 그 시간의 앞뒤가 뒤섞여 종종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헷갈리곤 한다. 그럴 때면 허방에 빠진 것만 같고, 실꾸리가 엉클어진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일전 길거리에서 만난 지인과의 대화가 아득하기만 하다. 서로 안부를 묻다가 돌아가신 모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벌써 가신 지 1년도 지났단다. 아니, 달포 전쯤이 아닌가. 아 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작년 봄 벚꽃 흐드러지게 핀 날 강변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그 장례식장에 갔었지. 그래, 망자의 영정을 등 뒤에 두고 다른 문상객들과 흔연스럽게 이야기까지 나누지 않았던가. 왜 시간은 까마득히 혼동 속에 뒤섞여 매몰된 것일까.

그뿐인가. 얼마 전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데 문득 지금이 몇 시인지, 며칠인지, 어느 계절인지, 순간 시간이 뒤엉켜버려 분별할 수가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우두망찰하고 서 있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까지 주르륵 흘렀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정체불명의 눈물이었다. 우세스럽고 민망스러워 건널목을 건너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그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현재라는 범위에 속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과거 시간 안에 머무는 걸까, 시간 밖에서 존재하는 걸까.

어느 수도원의 전설 같은 이야기다. 한 젊은 수도승이 낮에 일을 마치고 수도원 정원에서 묵상하며 걷고 있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을 화두 삼아 묵상 중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그는 숲 속을 걸으며 생각에 깊게 잠기느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걸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서둘러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식당으로 들어가 자기 자리로 향했는데 이미 낯선 수도승이 앉아 있었다. 주위에 늘어선 수도승들 역시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고 그들 역시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이름을 말하자, 지난 300년 동안 그 어떤 수도승도 여기에선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단다.

그 이유는 옛날 그 이름으로 불렸던 수도승이 숲 속에서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란다. 그 젊은 수도승이 수도원장의 이름과 자신이 수도원에 입회한 때를 말하자, 그들은 수도원 연대기를 꺼내보고는 300년 전에 사라졌던 수도승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젊은 수도승은 깜짝 놀랐고 그 순간, 그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고 말았다.

시간은 무의식이나 가장 내적인 곳에서 작용할 터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어찌 생각하고, 지금은 어떻게 인식하며, 앞으로는 어찌 대응해야 할까. 현재는 영혼의 경험이고, 과거는 영혼 속에 있는 회상의 이미지이며, 미래는 영혼의 기대 안에서만 이루어질 텐데 말이다.

그저 시간의 꽁무니만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하나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일지언정 현재의 현재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 같다. 시간은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짧은 인생, 시간의 낭비 때문에 더욱 삶이 짧아질 수야 없지 않은가.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분별하기가 난망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하는 말을 침묵 속에서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우리가 평등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낮고 보잘것없거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에게도 분명 시간은 있다. 아, 혼란스럽고도 아까운 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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