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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취하다 / 박헬레나

부흐고비 2019. 12. 8. 22:42

취하다 / 박헬레나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거실 창 앞에 차탁茶卓 한 세트 들여놓았습니다. 줄이고 버리고 정리하는 마당에 웬 새살림이냐고요? 넋 놓고 마주 앉아 취해 볼 벗이 생겨서입니다.

주택에 있을 때 해거리로 한 대씩 피워 주던 난蘭이 아파트로 이사한 후 해마다 촉 수를 늘여 가더니 올해는 자그마치 여섯 대를 피워 올렸습니다. 아마도 공동 주택 발코니가 제 태생지와 환경이 비슷한 모양이지요. 아직은 봉오리를 부풀리고 있으나 입춘이 가까워 오니 머지않아 꽃잎을 열 것입니다.

뭉툭하게 꽃대를 밀어 올리는 입동 무렵부터 나는 봄을 맞습니다. 피는데 석 달 피어서 석 달, 나의 봄은 길고 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 맞춤부터 하는 인사에 화답이라도 하듯 꽃봉오리들은 몽실몽실 부풀어갑니다. 편리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으나 삭막하기 그지없는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에 생명의 기를 뿜어내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촉 셋이 올라와 꽃잎을 활짝 열던 어느 해, 지인들을 불러 꽃 잔치를 벌였습니다. 혼자 보고 넘기기엔 아깝고 아쉬워서였지요. 봄볕에 취하고 꽃에 취하여 한바탕 신선놀음해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꽃 한 송이에도 이렇게 유난을 피우는 건 그동안 퍽 구차하게 살아왔단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들갑을 떠는 건 나 혼자, 그들은 그저 ‘곱네….’하고 지나칠 뿐 꽃에 취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무지 풍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니…….

‘취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열중해서 마음을 쏟고 넋을 빼앗긴다는 의미입니다. 흔히들 술에 취하고, 놀이에 빠지고, 미색美色에 취하기도 합니다. 무언가에 지나치게 취하면 늪에 빠져 삶을 그르치기도 합니다만 허구한 날 정색을 하며 맨정신으로 삶과 대적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가끔은 삶의 양념이 되기도 하는 것이 취하는 맛 아니겠습니까.

멋없이 살아왔습니다. 술맛을 모르니 술에 기대어 휘청거려 본 적도 없고 가슴에 뜨거움이 없으니 사람에 취해서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곧잘 취하던 음악도 사는 일에 밀려나 나와는 틈새가 한참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한결같이 내 혼을 빼앗아 가는 건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신비입니다. 지난해 윤오월이 들더니 금년에는 개화기가 며칠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당의 매화도 근 열흘 지각을 하네요. 그 또한 신비입니다. 계절을 느끼는 생채 감각은 식물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느낍니다. 태양만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림자에 불과한 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래서 우리네 조상들이 달의 시간, 음력을 들고 절기에 따라 영농을 했나 봅니다.

실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습니다. 꽃 한 송이에도 나는 취합니다. 더욱이 피우기 어려운 난꽃이라니… 귀하디귀한 생명 아닙니까. 새 탁자 위에 차 한 잔 올려놓고 갇힌 공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생명과 마주합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력과 의지와 열정을 읽습니다. 대견합니다. 나는 압니다. 꽃이 되기까지의 지난한 그의 여정을, 살아낸다는 것의 위대함을.

막 터지려는 꽃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봄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입니다. 행여나 오실 임을 기다리며 올해도 꿀을 마련했나 봅니다. 기다림입니다.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에는 유리벽이 철통같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속절없이 속을지라도 기다림은 희망이라고, 삶을 살아내는 힘이라고, 기다림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그가 자근자근 일러 줍니다.

생명 안에 깃들어 있는 위대한 힘, 모든 존재 안에 숨어 있는 사랑의 신비를 교감하며 우리는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습니다. 꽃과 나 그리고 둘을 더욱 차지게 어울려 줄 차 한 잔이 필요합니다. 서로에게 취해서 삶의 동질감을 느껴 보는 것, 그 순간을 향유하며 다음 봄을 기다리기 위해 이 조그만 탁자는 꼭 여기 있어야 할 오브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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