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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금꽃 / 박월수

부흐고비 2019. 12. 8. 22:44

소금꽃 / 박월수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곰소의 여름은 짭짤하다. 곰소에서는 태양도 소금밥을 먹고 뜬다. 사는 일이 물에 물탄 듯 싱겁게 느껴질 때 나는 곰소로 간다. 폭양 아래서 소금꽃을 피우는 염부를 만나러 간다. 소금밭 물거울에 비친 그들 경건한 몸짓을 매만지러 간다.

염전 초입에서 허기에 발목이 잡혔다. 무한정 내어주는 간장게장 한 상 차림으로 점심을 먹는다. 등딱지 살은 비리고 짠데 뒤이어 오는 고소함이 앞의 맛을 덮고도 남을 만큼 관대한 맛이다. 다리 살은 입천장에 착 달라붙을 만큼 찰지다. 체면이란 녀석은 뉘집 빨랫줄에나 걸어두고 쩝쩝거리는 소리 곁들여 알뜰하게 발라 먹는다. 짭조름해진 입안을 함께 나온 꼬막 국물로 헹군다. 서해 한 귀퉁이가 딸려 들어온다. 향긋하니 시원하다. 등딱지에 쌀밥을 비벼 맨 김에 싸서 한 입 먹는다. 비린 맛을 또 다른 비린 맛이 품어준다는 걸 바다에 등 기대고 사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나보다. 포근하게 안기는 맛이다. 남은 밥 한 술에 갈치속젓을 얹어 마저 비우니 비로소 바다에서 나는 작은 금이 이것들을 완성했다는 생각에 미친다.

세자 책봉을 앞둔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 모아 슬기를 시험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왕자들이 떡이며 꿀, 고기라는 말을 늘어놓을 때 광해군은 소금이라 답했다. 모든 음식엔 소금이 들어가야 맛을 내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왕을 만들어 낸 소금이 몸 속에 들어온 덕분인가 처졌던 기운이 솟는다.

게장 냄새와 젓갈 냄새가 골고루 밴 몸을 이끌고 그들 기원을 찾아가듯 소금밭에 이른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강렬하다 못해 폭력적이다. 너른 염전에 가득 들어찬 소금물을 덜덜 볶을 것처럼 따갑게 쏟아붓는다. 소금밭을 가꾸는 염부가 가장 좋아하는 볕이다. 뙤약볕 아래 꽃 모자를 눌러 쓴 염부가 보인다. 소금꽃이 피기 시작한 염전을 고무래로 훑으며 지나간다. 의아스러워 하는 방문객을 향해 자는 물을 흔들어 깨워야 소금꽃이 빨리 핀다며 귀띔을 한다. 고여 있던 소금물이 은빛으로 흔들리더니 얕은 소금밭은 이내 고요를 찾는다. 멀리 능가산 꼭대기와 명징한 하늘이 잽싸게 들어와 가부좌를 튼다. 염부의 일손은 더 바빠져야 될 것 같다. 벌써 갈증이 나는 걸 보니 싱거운 일상에서 떠나오긴 했나보다.

낡은 소금창고 귀퉁이 보자기만 한 그늘을 깔고 앉는다. 소금밭을 보러 와서는 뙤약볕이 무서워 숨어서 보낼 참이다. 바람과 햇볕과 사람이 간여해서 소금꽃 피우는 일을 넌지시 지켜본다. 태양이 소금물을 갉아먹는 동안 바람이 거들고 고무래 든 염부가 부추기는 걸 바라본다. 물이 꽃이 되려고 부대끼는 염전 바닥에 내 마음을 꺼내 비춰본다. 소금밥 먹는 볕과 귀때기마저 하얀 바람과 대파질로 뼈대가 굵어진 염부만큼 독하게 살았는지 묻는 소리 들린다. 늘 뒷걸음치며 살아온 터라 대답이 궁색하다. 스무날을 공들여야 귀한 소금은 온다는데 겨우 한나절을 쪼그리고 앉아 나는 무얼 하자는 것일까. 소금꽃 피는 소리와 물거울에 비친 염부의 표정을 음미하며 마음에 적당히 간이 배이길 기다린다.

일 년에 반을 염부는 소금밭에 빠져 산다. 달무리를 보고 바람의 방향을 읽으며 우주와 소통한다. 언제쯤 낮은 지붕으로 된 해주 아래 소금물을 가둬야 할지를 미리 가늠한다. 꽃모자 쓴 염부의고무 장화 안에서는 땀에 절어 끈적이는 발이 미끄럼을 탄다. 토시 낀 팔이며 햇볕을 정면으로 받는 등줄기에서도 땀은 비처럼 흐른다. 그에겐 제 몸마저 염전이다. 물거울에 비친 하늘을 다듬으며 성전을 가꾸듯 고무래를 미는 염부는 소금을 바가지로 쏟은 저녁, 막걸리 한 사발로 몸을 위무하는 삶의 멋도 안다. 생이 농축된 가장 짠맛은 어쩌면 지극히 감미로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잠시 소금창고를 기웃거린다. 함석지붕을 이고 벽에는 기다란 판자를 덧댄 소금창고는 염전 가장자리에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속엔 소금산이 살고 있다. 쓴맛을 제하고 단맛을 품으려는 창고의 시간이 곰삭고 있다. 간수를 버리느라 흘렸을 창고의 눈물을 생각한다. 달짝지근한 소금을 낳기 위해 엎드렸던 창고의 기억 속에 부패한 것들은 없다. 소금을 오래 안으면 햇볕으로 달아난 물의 영혼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 누가 소금을 짜다고 했을까. 소금창고가 간직한 하얗고 작은 금은 달다.

능가산 너머로 노을이 진다. 소금꽃이 잠을 청할 시간이다. 한 뼘 그늘도 없이 염전을 누비던 염부가 장화를 벗어 툭툭 턴다. 마음에 한소끔 간이 밴 나도 이제는 돌아갈 채비를 한다. 소금꽃 피우는 일처럼 독하고 덤덤하게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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