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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메밀 베개 / 박월수

부흐고비 2019. 12. 8. 23:28

메밀 베개 / 박월수


가을볕에 베갯속을 말린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눅눅해진 메밀껍질을 볕에 널었다. 먼 바이칼 호수와 아무르강에서 이곳까지 흘러왔다는 메밀은 그 힘든 여정만큼이나 가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꽃에는 꿀이 많아 벌꿀의 밀원이 되고 제 알맹이는 풍부한 먹을거리와 약재로 내어준다. 그러고도 할 일은 남아 껍질은 베갯속으로 쓰이는 이로운 식물이다.

남편은 메밀 베개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가 혼수로 장만해 온 침대마저 누우면 등에서 땀이 난다는 이유로 몇 개월 만에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처럼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니 차가운 성질을 가진 메밀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처음 베개를 장만할 때 두어 됫박은 실히 될 것 같던 메밀껍질이 지금은 그 부피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남편은 자꾸 낮아지는 베개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나는 더 보충해줄 맘이 없다. 베개 높이와 건강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니 말이다.

대나무 채반에 널어놓은 메밀껍질은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흩날린다. 게 중 하나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본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암갈색 껍질을 펴보니 작고 앙증맞은 꽃잎 세 장을 붙여 놓은 모양이다. 하얗게 무리지어 피는 화사한 꽃에만 눈길을 줄줄 알았지 지금껏 한 번도 어두운 빛깔을 지닌 열매를 관심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열매의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섭섭한 일이었을까. 성의를 다해 꽃피우는 일 못지않게 비바람 견디며 열매 맺는 일 또한 숨 가쁘게 힘에 부쳤을 것이다. 더구나 척박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라면 더욱더 그러했으리라. 마치 내 남편처럼.

날마다 사다리를 타야하는 남편은 잠자리에 누우면 늘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십 수 년 조명공사를 해 온 그는 사다리에 의지해 천정을 보는 시간이 땅을 짚고 선 시간보다 더 많았다. 몸의 균형을 잡느라 구부린 한 쪽 다리와는 다르게 힘을 주고 버틴 다리의 종아리에 어느 날부터인가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푸른 핏줄이 만들어 내는 무늬가 내를 그리고 강을 그리고 산맥을 만들었다. 뜰 안 가득 꽃들이 수런거리는 봄밤에도 사다리를 타고 들어 온 그의 몸에선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깊이를 더 해 갔다. 그럴 때 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깨끗이 손질한 메밀 베개를 내어주고 그의 아픈 다리를 만져 주는 것뿐이었다.

소규모 건축현장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기에 앞서 계약서를 먼저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사대금은 늘 후불제였다. 그런 관행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어서 그의 종아리에 똬리를 튼 덩굴나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건축업자의 파산이나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하여 물건 값과 인건비를 고스란히 날리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아무리 미수 금액이 많아도 받을 수 없는 돈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공사에 쓰인 자재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의 수고비는 빚이 되어 상처받은 남편을 날마다 괴롭혔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당신은 남 좋은 일 참 많이도 했으니 적어도 지옥엔 안 갈 거다.’ 라는 너스레를 위로랍시고 떨었다.

작업현장에서의 일은 대부분 일몰과 함께 끝이 났다. 하지만 낡은 사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들어와 메밀 베개를 베고 편히 쉬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언제나 업자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공사를 수주하고 시공하고 결재를 받는 일까지 혼자서 뛰어야 하는 힘든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제 몸은 묵과 냉면, 혈압약이 되고 그러고도 껍질은 남아 베갯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감내 해야 하는 메밀처럼.

평소에 따뜻한 성품을 가진 남편이지만 가끔씩은 까칠하고 차가운 메밀을 닮아 있었다. 고단한 현장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게에서 맡아 놓은 동네 출장을 다시 나서야 했다. 그러다 지치고 힘이 들면 가게에 발목이 묶인 채 꼼짝할 수 없는 나를 향해 거친 말들을 내뱉곤 했다. 메밀껍질을 맨살에 부빌 때처럼 아리고 따가웠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미모사마냥 움츠러들고는 했는데 그의 덩굴진 종아리를 떠올리곤 안쓰러운 마음만 가득 쌓이곤 했다.

차가운 날씨에 손끝이 해어지고 발바닥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면 그는 미세한 틈으로 연고를 밀어 넣고 성냥불을 그어댔다. 그런 아픈 풍경을 볼 때마다 나는 메밀꽃 냄새를 맡곤 했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메밀꽃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리 향기롭지 않은 꽃이었다. 남편의 일도 그랬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 일은 무척 화려하게 내 눈에 비쳤다. 그가 얼마간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삭막한 실내가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밋밋하던 정원이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작 사다리위에 있는 그의 거친 숨소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해가 거듭되면서 그가 타는 사다리가 빛이 바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오래된 덩굴나무는 튼실하게 뿌리를 뻗어 나갔다. 그는 ‘하지정맥류’를 가진 환자가 된 것이다. 비 오는 날 전선을 만지면 손끝으로 저릿하게 전류가 흐른다고 했다. 무거운 조명등을 오래 달다 보면 뒷목이 뻣뻣해져 나중엔 감각이 없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사다리에 올라있는 동안은 오히려 익숙해서 편안하다며 웃었다. 비탈진 땅에서 가뭄에 목마르지 않고 충실히 열매 맺는 메밀처럼 그는 자신의 다리에 덩굴나무를 키우며 척박한 환경에서 버티는 법을 익혀왔던 것이다.

조물조물 빨아 널었던 속통이며 홑청이 보송하게 말랐다. 햇볕과 바람을 쐬어주어 한결 가슬가슬해진 메밀껍질을 속통에 넣어 여미고 홑청을 입힌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바느질을 한다. 촘촘하게 박음질 된 베게 홑청의 골진 자리마다 가족을 위해 애써 참아 온 그의 피곤과 시름이 녹아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쪽이 시리다. 속통 가장자리 둥근 베갯모에는 갖가지 문양이 수 놓였고 그 가운데 구름 위를 두루미 한 쌍이 다정히 날고 있다. 그의 잠도 이렇듯 아름답고 달콤했으면 좋겠다. 열이 많은 이의 몸을 식혀주는 메밀이 그러하듯 어두운 곳의 불을 밝히는 그의 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임을 알기에 메밀베개를 베고 누운 그의 잠도 참으로 편안할 걸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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