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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환상통 / 박월수

부흐고비 2019. 12. 8. 23:37

환상통 / 박월수


세상의 모든 벽은 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절실하게 넘어야 할 장애물이라면 거기에 깊게 스미어 벽이 저절로 무너지게 하는 법도 있다. 유우니 사막의 소금기둥이 빗물로 인해 녹아내리는 것처럼.

내게는 손가락이 모자라는 오빠가 있다. 그는 지금 환상통을 앓고 있다. 예리한 칼끝에 그의 손은 난자당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손가락 마디를 날카로운 바늘로 쉴 새 없이 찔러댄다. 그는 어른이면서 아이처럼 아파한다. 그럴 때 마다 술을 마시고 물멀미를 하듯 비틀거렸다.

알콜병동으로 그를 면회하러 갔다. 병동 입구에는 안으로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문이 버티고 있었다. 묵직한 무엇이 가슴을 짓눌렀다. 신분 확인이 끝나고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남자는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역한 크레졸 냄새가 온 몸을 휙 하고 덮쳤다. 이 속에서 그가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조금 넓은 복도에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탁구를 치고 있었지만 그들 무리 속에 숫기 없는 그는 없었다. 상담실로 안내되었다. 남자 간호사는 내게 간단한 질문과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는 그를 데리러 갔다.

잠시 후 언제나처럼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그가 나타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오빠로서 동생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나른해 보이던 그는 갑자기 간절한 눈빛을 한 채 내게 말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여기서 하루 빨리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필요한건 없느냐 물으니 그는 또 아이처럼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다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한 쪽 손은 여전히 바지주머니 속에 단단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가 왼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숨기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는 섬유공장이 즐비했고 그는 그곳에서 직물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었으므로 자부심도 가득했다. 고장 난 베틀수리가 끝나고 고운천이 짜여 나오는 걸 볼 때면 뿌듯함이 밀려든다고 했다. 그런 그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잠깐의 실수로 움직이는 베틀에 손을 넣었다. 미처 스위치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그 후로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그의 왼손은 늘 주머니 속에 똬리를 틀었다.

그는 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고 안으로 숨으려고만 했다. 우리 가족은 그를 향한 번뇌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여기저기 다리를 놓아 그의 짝을 찾아주려 애썼다. 마침내 그는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숨기고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 그에게도 더디게 가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눈을 흘기는 날이 찾아왔다. 물기 없던 입술에 윤기가 돌고 기름때로 얼룩진 오른손에 숨겨놓은 왼손을 포개어 자꾸만 비벼 씻었다. 우리 모두는 아이처럼 여린 그가 서울까투리마냥 넉살 좋은 여자를 만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였다.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쯤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왼쪽 주머니에 숨은 손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녀의 절망은 너무도 컸고 여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처럼 보였다. 우리는 한없는 미안함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섭섭함도 가졌다.

오래 고민하던 그녀는 오빠와의 결혼을 결정했다. 기뻐하는 가족과는 달리 이미 상처받은 그의 마음속엔 어쩔 수 없는 앙금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그의 치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법을 그녀는 몰랐다. 신혼 여행길에서 남편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아내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벽을 쌓고 있었다. 상처받은 이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은 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더 많이 아파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오빠를 보며 깨닫는다. 비를 맞는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일보다 함께 비를 맞는 편이 더 큰 위안이 되듯이 말이다. 이미 높은 벽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그를 밖으로 불러내는 일조차 그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지 못한 채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시간이 흘러 그는 다니던 공장의 주인이 되었다. 여전히 아내 앞에서조차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모습은 그대로였다. 기계를 돌보는 그의 곁에서 그녀는 베 짜는 일을 도왔다. 지켜보는 가족들은 씨실과 날실이 부지런히 움직여 한 두루마리의 완성된 천을 만들 듯 그들의 가정도 촘촘하게 수놓아 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툭하면 멈추는 그들 공장의 낡은 직물기계처럼 둘 사이엔 뭉툭한 씨줄과 뾰족한 날줄이 얽혀 쉼 없이 끊어지고 찢겨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부터 불안하게 시작한 두 사람의 결합은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기도 전에 끝이 났다. 마음에 쌓은 높은 벽을 허물지 못했던 그들은 사업실패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숨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의 환상통은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불행을 모자라는 손가락 탓으로 여기며 거칠어져 갔다.

병동의 굳게 닫힌 문과 크레졸 냄새에 익숙해진 때문인지 그는 그곳 생활에 순응해 갔다. 돈을 부쳐 달라는 전화도 뜸해졌다. 가끔씩 식사 시간에 면회를 가면 식판을 들고 얌전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를 볼 때도 있었다. 상담사는 그가 병실의 조장을 맡아 활달하게 지내고 있으며 병원내의 자질구레한 일을 해서 용돈을 충당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 얼마 후 그는 타의에 의해 실려 들어간 수용시설의 높은 벽을 뚫고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한 손은 바지주머니에 꽂힌 채였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퇴원 하는 날, 나는 그가 반듯하게 걷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 구두를 선물했다.

그의 환상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아내가 돌아온다면 그의 환상통도 끝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이미 벽속에 갇혀 본 그는 스스로 벽을 허무는 법도 익혔을 걸 믿는다. 지금껏 숨기고만 있었던 왼손을 당당히 내어놓고 그녀에게 깊이 스며들기를 또한 소망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놓고 말 할 수 없는 환상통 한가지씩은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만든 벽속에 갇혀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한 부분을 누군가 어루만져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벽은 자신이 만든 것이므로 스스로 허물어야 한다. 뛰어넘든지 혹은 깊이 스며들든지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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