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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청학(靑鶴) / 박월수

부흐고비 2019. 12. 8. 23:33

청학(靑鶴) / 박월수


봄은 바람과 내통하는 게 분명했다. 달빛으로 쌓은 성이라 이름 붙여진 내가 사는 마을에도 어김없이 바람은 불었다. 입술마저 파리해진 달이 몇 날을 그 바람에 떨고 나면 기척도 없던 봄은 눈앞에 와 있었다. 먼 산에 꽃 빛은 짙어지고 어디서 화전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 바람이 불어오기 전 오래 된 청소기를 바꾸었다. 연결대 하나가 부러지긴 했지만 어디 고장 난 곳 없이 잘 돌아갔다. 다만 너무 무거워서 청소를 할 때 마다 아픈 어깨가 더 아픈 게 문제였다.

신혼시절 처음 청소기를 살 땐 생각지도 않던 지출이라 많이 망설였다. 결혼 일 년 만에 좀 무리다 싶었지만 방 두 칸짜리 남의 집에서 거실 겸 주방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겨우 지난 때였다. 비질을 할 때 마다 일어나는 먼지가 갓난쟁이의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형편은 빠듯했지만 그와 나는 의논 끝에 최신형 물걸레 청소기를 할부로 구입했다. 그걸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사용했다. 집안의 가구 대부분이 청소기에 부딪쳐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물건에도 마음이란 게 있는지 정이 들대로 들어서 완전히 고물이 되기 전에는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대형마트나 전자제품 상가를 지날 때면 새로 나온 슬림형 청소기가 자꾸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째아이를 낳은 후부터 산후풍이 생겼다. 목과 어깨가 날마다 아팠다. 무거운 걸 들 때 마다 통증이 더 심했다. 살림을 하고 아이를 기르고 가게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여서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 가벼운 청소기를 바라보는 내 눈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끝내 모른 척 했다. 멀쩡한 걸 두고 새 물건을 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는 그가 당연한지도 몰랐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우연찮게도 전자제품 상품권이 생겼다. 나는 서둘러 슬림형 청소기를 구입했다. 지난 번 청소기에 비하면 부피도 절반에 가격도 절반이었다. 새로 산 청소기는 날씬하고 가벼워서 자꾸만 밀어보고 싶어졌다. 청소가 신이나니 시간도 반으로 준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껏 참고 살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투박하고 볼품도 없으면서 무겁기만 하던 옛날 청소기가 갈수록 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모양내는 것도 모르고 묵묵히 먼지만 빨아들이는 청소기. 제 할 일에만 충실한 그것이 조강지처인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제 몸 어느 한 군데가 부러져도 본연의 의무에 한 치의 게으름도 없는 못생긴 청소기에 어쩔 수 없는 연민이 느껴지곤 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겨 넣어둔 창고 쪽으로 나도 모르게 눈길이 쏠렸다.

그와는 반대로 온갖 멋을 부린 새로 산 청소기는 가볍고 매끄러워서 꼭 첩 같이 생각되었다. 치장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긴 호스는 부드럽고 투명해서 절로 눈이 갔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입구는 작고 날렵해서 어지간한 가구 밑에도 쏙쏙 잘 들어갔다. 장애물을 만나면 끝이 반반씩 접어져서 불편을 덜어주었다. 마트에서 그 물건을 맨 먼저 보았을 때, 생긴 모양에 까무룩 반하고 접어지는 주둥이 때문에 두 번 반해서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고 덜컥 사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그 물건을 쓰면 쓸수록 지난 번 청소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기계의 소음도 줄어들고 무게도 가벼운데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 되짚어 보았다. 투박한 옛날 청소기 보다 먼지를 흡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었다. 겉모양만 예쁜 청소기를 산 걸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제는 싫다고 물릴 수도 없었다.

그즈음, 남편에게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만나는 여자는 새로 산 청소기 같은 여자였다. 전화기 속의 그 여자는 간드러지는 위쪽지방 말씨를 쓰고 있었다. 전화 목소리에 나긋함과 젊음이 배어있었다. 그런 여자지만 남편이 그녀를 만나면서 편안하고 행복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간 내가 본 그의 낯빛은 사는 일이 더 이상 환멸스러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며 툭하면 거칠게 행동했다. 말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습관처럼 굳어갔다. 그는 마치 오늘만 살고 말 것처럼 술을 마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그의 몹쓸 다감함을 떠올리며 힘든 그를 위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밖으로만 돌았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투박하고 못생긴 청소기처럼 살아온 날들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없는 자책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는 결국엔 앓아누웠다. 부르지 않아도 봄은 왔지만 나는 폐허처럼 누워만 지냈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인 날의 연속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들으려고 켜놓은 텔레비전은 저 혼자 시끄러웠는데 문득 다가오는 한 마디가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꽃은 피고, 불어야 될 바람은 불고, 봄은 온다.’

나는 느닷없이 봄 구경이 하고 싶었다.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꾸역꾸역 물에 말은 밥을 먹고 억지 기운을 차렸다. 어설프나마 채비를 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하늘은 눈이 시리고 햇빛은 몽롱했다. 고속도로 어디쯤에서 청학이란 이정표와 맞닥뜨렸다. ‘청학’ 언젠가 내가 꿈꾸었던 적 있는 이상향이었다.

청학엘 가면 푸른 학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람의 얼굴을 닮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영물. 파란 바위와 검은 골짜기를 지나 가끔씩 내려와 물을 마신다는 깊은 연못엘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여덟 개나 된다는 청학의 날개 하나를 빌려 타고 나도 하늘을 날아보면 어떨까. 말 안하고도 살 수 있는 청학의 등에 올라타면 숨쉬기도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묻고 또 물어 찾아간 청학연못에서 나는 푸른 학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흰 옷 입은 도인들이 사는 조용한 골짜기에서 내가 본 건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순간도 제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여서 꽃을 깨우고 계곡물을 흔들었다. 바람이 저렇듯 쉼 없이 불어가면 어느 사이엔가 봄꽃은 시들고 계절은 지나갈 터였다. 죽을 만큼 아픈 상처도 바람결에 아물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상상속의 청학이 내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나고 보면 그때 본 바람은 청학에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나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또 졌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찾던 청학은 바로 내 가까이에, 내 맘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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