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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엄지발톱 / 박경혜

부흐고비 2019. 12. 12. 09:53

엄지발톱 / 박경혜
2013 삼성엔유 문학공모전 당선작


네일아트 집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화려한 손톱들이 여인의 빈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화려함에 감탄하곤 했다. 마음이 울적한 날, 호기심 반 허전한 마음 반으로 손톱에 이어 발톱까지 내밀고 앉아있다. 발톱이 예쁘시네요. 늘 밉다고 생각하던 발톱인데 인사삼아 하는 소리일지라도 싫지는 않다. 곱게 화장하는 엄지발톱을 바라보는데 문득 기억 하나가 살아난다.

내 발톱을 만지작거리던 다섯 살 아이가 엄마는 몇 살 때 발톱이 빠지냐고 묻는다. 무슨 소린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외할머니, 아빠 발톱 빠졌잖아. 외할머니는 몇 살 때 발톱 빠졌어?” 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도록 웃고 나서야 엄마는 발톱 안 빠진다고, 외할머니는 다쳐서 그렇다고 말해준다. 아휴, 다행이다 안심하는 아이. 그 안도의 소리에 마음 한구석이 뻐근하다. 나는 어머니의 엄지발톱에 한 번도 아파해 본 적 없었다.

바쁜 농사철,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늦어버린 새참을 내가다 돌부리에 채여 발톱이 물렁거렸다. 며느리에게 살뜰하시던 시아버지가 약을 붙여가며 애쓰셨지만 덧나기를 반복하다 결국 빠져버렸다. 아플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고름과 고통으로 물렁거리는 시간, 자유분방한 남편은 아내의 울타리가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발톱이 빠진 자리보다 서걱거리는 남편과의 사이가 더 아팠다. 아버지에 대한 소문이 바람을 타고 우리 집 울타리를 넘나들었다. 읍내에서 시앗을 보았다는 소문에도,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에도 어머니는 애써 귀를 막곤 했다. 그저 소문일 뿐이다. 시아버지가 어린 며느리를 다독여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애썼다. 어머니는 빠진 것이 하필 엄지발톱인 게 못내 불안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여자인 적이 없었다. 가족에게 저당 잡힌 당신의 시간은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의 그것이었다. 일용할 열매를 주고, 집 지을 가지를 주고, 꿈을 찾아갈 줄기를 내주고도 쉴 밑동까지 내주는 나무여야 했다. 자식들은 그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먹고 제각각 살 길을 찾아 떠났다. 나무 밑동에 번지던 눈물 자국도, 깊이 파이던 우물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보았음에도 애써 외면했는지 모른다.

‘병원입니다.’ 어머니가 길가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갈이다. 병명도 어려운 뇌혈관 질환으로 어지러워 허방을 짚으며 전화를 할 때마다 바쁘던 자식들이 시간을 느슨하게 풀며 사색(死色)이 된다. 아무도 바쁘지 않다. 그저 병상에 붙어 앉아 젖을 기다리는 아기마냥 아무것도 못 하고 어머니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나는 괜찮다. 그만 가서 일 봐라.” 괜찮지 않은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자꾸 괜찮다고 하신다. 당신이 아무리 그러셔도 바쁠 수 없는 자식들은 아직도 엄마의 젖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여태 모른 척하고 있던 생명의 물, 젖가슴이 그리워지고 있다.

잠든 어머니의 엄지발톱을 가만히 만져본다. 젊은 여자였던 발톱 자국이 선명하다. 동그랗고 예쁘다. 이렇게 자세히 엄지발톱에 관심을 둔 것은 처음이다. 골골이 주름 잡힌 얼굴과 선이 가늘어진 어깨, 모르는 사이 어머니는 작아져 있었다. 힘겨울 때 자식들이 돌아가야 할 든든한 집이 아기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가슴을 친다. 인정할 수 없는 부피다. 보호받아야 할 내 아이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은 물이 낯빛을 바꾼다. 어제의 잔잔하고 투명한 몸을 통째로 뒤집어 숨겨놓은 제 속을 다 드러낸다. 퇴원한 어머니의 모습 같다. 투박하고 완고하던 당신은 병원을 나온 후 여자가 되어가고 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 타령을 한다.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빠진 발톱자리에도 망설이지 않고 붓질을 한다. 어머니의 나들이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지고 있다. 느긋하게 시간을 풀며 여자가 되고 있는 놀라운 변화에도, 다투어 사다 드리는 옷을 타박하는데도 아무도 찡그리지 않는다. 애초부터 효자 효녀였던 듯 스스로 대견해 하며 뿌듯하다.

한계다. 부모의 인내는 평생이지만 자식의 인내는 순간인가 보다. 자식들은 화사해지고 있는 어머니의 시간을 더는 기다려 주지 못하고 점점 조급해진다. 빨리빨리 엄마! 여자가 되고 있는 시간을 잡아당기며 재촉한다. 바쁠 것 없는 어머니는 색깔이 난하다거나 병자 같다며 입술연지 바르고 지우기를 열두 번 반복한다.

빨간 입술연지에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나서는 어머니, 봄꽃 같다. 샌들 밖으로 수줍게 얼굴 내민 엄지발톱에도 분홍 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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