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줄 / 박태칠

부흐고비 2020. 3. 15. 09:01

줄 / 박태칠


“줄을 서야 됩니다. 할머니! 그렇게 새치기 하시면 안 됩니다.”

어림잡아 70여 명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밥 차 앞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맨 앞쪽으로 쑥 끼어든다. 나는 할머니를 제지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뿌리치고 대열에 들어서고 만다. 머쓱해진 나를 향해 뒷줄에 선 영감님이 노발대발 고함을 친다.

“저런 새치기 하는 할망구 안 끌어내고 뭐하나?”

“연세가 좀 드신 분인데 좀 봐드리지요”

졸지에 나는 새치기를 한 할머니 편이 되어 영감님에게 사정을 한다. 밥 차를 운행할 때마다 겪는 진풍경이다.

이 곳 자원봉사센터에서 밥 차로 무료 급식 활동을 한지가 일 년,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유독 안 되는 것은 어르신들의 줄서기다. 늦게 온다고 하더라도 밥이 모자란 적은 없었지만 새치기를 당연시하는 몇몇 할머니들 때문에 대열은 항상 소란하다.

나는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좀 체격이 있고 당차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새치기를 막아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상 군기반장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대열의 중심부 근처에 가서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고 새치기 하는 사람들을 큰소리로 나무라기 시작한다. 그녀의 서슬에 어느 정도 질서가 갖춰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주변 골목길을 살펴본다. 뒤늦게 찾아오는 몇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이쪽으로 온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 정도 찾아오는 사람도 뜸해지고 줄도 조금씩 꼬리가 짧아진다. 그때쯤 나는 낯익은 할머니를 발견하고 움찔 놀라서는 뒤로 돌아선다.

어제의 그 할머니다. 폐지를 수거하던 할머니인데 손수레에 박스를 가득 싣고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해 오던 할머니였다. 느릿느릿 도로를 가로질러 오느라 도로 양쪽의 차들이 모두 막혀버렸다. 경적소리와 운전자들의 매서운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는 할머니를 보고 도로변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야, 해도 해도 너무하다. 저런 할망구는 경찰에서 단속을 해서 혼을 좀 내야 한다.”

“아이고, 경찰이 데려가면 뭐 하겠노. 벌금 낼 돈이나 있겠나. 괜히 리어카하고 폐지 값 물어내라 하고 달려들면 경찰만 골치 아프지.”

그때였다.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도로에 뛰어들더니 할머니 손수레를 같이 당겨주기 시작했다. 속도를 낸 손수레는 금방 도로를 가로질러 이쪽 끝으로 다가왔고 인도 블록 턱에 걸려 힘겹게 용을 쓰고 있었다. 그때까지 방관자 역할을 하던 나도 그제야 달려가서 힘을 합해 손수레를 잡아당겨 인도위에 올렸다. 차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할머니는 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만 그는 말없이 골목길로 사라졌다.

“아이고, 선상님도 고마워요.”

“아니 할머니, 횡단보도로 다니셔야지. 이렇게 무단횡단하면 어쩝니까?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대답대신 역정부터 내는 내게 할머니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고 숨만 가쁘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문을 열었다.

“사고 나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소.”

기가차서 말문이 막힌다.

“횡단보도까지 내가 이걸 끌고 어떻게 가? 그럴 힘이 어디 있어? 점심도 겨우 미숫가루 한 그릇으로 때웠는데.”

측은한 마음이 든다.

“자식이 있으면 뭘 해? 마누라는 도망가고 제 새끼 간수도 못하는 것을.”

이쯤 되면 소설이 한 편 나올 상황이다.

“높은 사람도 안 지키는 법을 나보고 지키라고? 내가 법 지키고 살았으면 벌써 자식새끼 굶어죽이고 나도 굶어 죽었지. 암만 무식해도 그것은 나도 알아”

할 말이 없다. 하기야 그 시절은 그랬을 것이다. 보릿고개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절 아니던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과 먹히고 먹는 치열한 삶터에서 못 배운 할머니가 자식을 키우며 살아왔을 고단한 삶이야……. 그 와중에도 배운 사람들은 법을 악용하여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니 요즘 청문회를 보면 전직대통령부터 국무총리를 포함한 고위 관료들의 위장전입 행위는 기본적인 자질이 아니던가?

나는 내일 이 근방 공원에서 밥 차를 운영하니 점심때 와서 잡숫고 가라고 당부했다.

“이밥과 소고기 국을 공짜로 준다고? 정말인교? 선상님이 책임자인교?”

나는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미심쩍어 하며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할머니다. 어제의 그 할머니가 부지런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가 줄을 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 나는 외면 한 체 할머니를 곁눈질 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줄을 완전히 무시하고 배식대 제일 앞으로 바로 갔다. 겨우 질서를 바로 잡아 놓았던 그 군기반장 아주머니가 부리나케 쫓아가 제지를 한다. 이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밥을 여기서 주는데, 왜 저 뒤에 가서 서라 카노?”

나는 재 바른 걸음으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간다. 줄을 선 할아버지들의 고함소리와 군기반장 아주머니의 완력에 못이긴 할머니가 할 수 없이 떠밀려서 줄 뒤로 밀려간다.

“여기 책임자 선상님 어디 갔노?”

고함소리가 50미터 가까이 떨어진 공중화장실까지 들린다. 나는 공중 화장실에 숨어서 그 할머니가 밥을 받을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 / 김시헌  (0) 2020.03.16
얼굴 / 안병욱  (0) 2020.03.15
거리에서 만난 여자 / 현진건  (0) 2020.03.13
겨울밤 세석에서 / 백남오  (0) 2020.03.13
소금 / 김원순  (0) 2020.03.1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