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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부부 / 김시헌

부흐고비 2020. 3. 16. 12:35

부부 / 김시헌1


밤중에 잠을 깰 때가 있다. 대개는 용변 때문이다. 일어나서 툇마루를 지나 마당에 내려서면 어떤 때는 달빛이 환하다. 오밤중에 보는 둥근 달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티 없이 트인 달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달처럼 환해진 것 같은 자기 마음에 대한 착각이리라. 화장실이 마당을 건너가야 나타나기 때문에 밤에 달을 보는 것은 화장실로 해서 얻는 부수입이다.

달빛이 아까워서 마당에서 좀 서성거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문을 다 열어 놓은 방안은 달빛의 여광으로 사람과 물건을 낮같이 볼 수 있다.

방에는 아내가 혼자 잠들어 있다. 아내의 나이는 지금 오십에 육박하고 있다. 여름이어서 이불을 걷어찬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모기장 속에 갇혀서 세상을 잊고 있는 아내의 몸 전체를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바라본다. 낡은 기계가 된 아내의 몸은 많이 쇠잔해 있다. 통통하고 몽실몽실했던 30년 전의 곱던 피부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어깨의 뼈, 기운을 잃은 팔뚝, 장다리는 나무 작대기모양 꼿꼿하기만 하다.

아내는 신부 때 턱 모양이 예뻤다. 동그스름한 선이 잘 만든 빵떡을 연상시켰다. 빵떡 같다고 하면서 소녀를 다루듯 턱을 만지려 들면, 겨우 빵떡이냐면서 내 손을 되밀었다. 그 턱도 이제는 고무주머니가 되었다.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아름답다든가 예쁘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없다. 앞으로 시간이 또 지나가면 주름은 더욱 많아지고, 볼은 더욱 깊어지고 피부는 나무껍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 때문에 아내가 옛날보다 더 미워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놓은 아내의 엉성해진 골격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감회가 된다. 좋게 말해서 인생의 완성이나 정리기라고 할 수 있고, 다르게 말해서 인생은 허무요 비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현명하다. 자기의 늙음에 대해서 말이 없다. 생각하다생각하다 말을 잃었는지 모른다. 말해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체념을 하였는지 모른다.

결혼하던 첫날밤 나는 너무도 숫된 스물 두 살의 남자였다. 여자에 대한 체험이 없었던 나는 가슴만 두근거렸다.

당시의 풍속대로 아내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몸에 손이 닿는 것을 의식한 아내는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도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내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놓기는 해도 움칠움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내라기보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몸을 가까이 하는 한 사람의 여인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문구멍으로 엿듣던 사람들이 흩어져 가자, 그제야 말을 걸어 보았다. 무엇을 처음 물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묻는 말에 아내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고요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생각보다는 대담한 대답이었다. 내 귀로 들어간 첫 여인의 음성이라고 할까? 말의 내용은 잊었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듣던, 신선하고 고요하고 다정한 음향이었다.

나는 그때 동작이 너무 서툴렀다. 둔하고, 어색하고 촌스러운 몸짓이었다. 한 번 더 결혼을 한다면 예날 같은 그러한 서툰 동작은 안 하리라 생각되지만, 그때 서툴렀기 때문에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사람들은 첫사랑을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나의 첫사랑의 대상은 바로 아내였다. 정이 들기 시작한 나는 대단한 연정으로 연애 감정에 빠져 들어갔다. 아내는 친정에 있었고, 나는 직장 때문에 먼 곳에 혼자 가 있었다. 당장 살림을 차릴 사정이 못 되었던 것이다.

애인을 생각하듯 나는 온종일 아내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사진 한 장이 유일한 위안물이었다. 서랍 속에 넣어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보았다. 눈, 코, 입의 모양, 빵떡 같은 턱, 그리고 전체의 표정이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에 미치는 모양이다. 편지도 많이 썼다. 연애편지와도 같았다. 가진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아내에게서 편지가 오면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다. 편지 중의 어떤 구절은 가슴속 깊은 곳을 만족시켜 주는 참 감미로운 충격도 있었다.

나는 그때의 감상(感傷)을 소중한 나의 인생의 재산으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면 첫사랑의 감정이 그와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애정과, 아내 아닌 다른 이성과의 애정은 질에 있어서 많이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첫사랑의 감정도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잠들고 있는 아내의 표정은 양처럼 평화롭다. 늙었지만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순진해 보인다. 자고 있는 악인은 없다는데 아내가 악인이었다 해도 저렇게 평화롭게 보일까?

신부 때와도 같은 얌전도 없고, 여성이 가지는 조심성도 없다. 아내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멋대로 자고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여성은 중성(中性)이 되어 간다. 옛날과 같은 여성을 아내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있다면 3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해 온 역사의 부피이다. 전우애와도 같은 믿음이라고 할까? 아내 때문에 속을 썩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 앞에서 힘이 약해진다. 나이 앞에서는 더욱 더 약해지는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아내와 나에게 남아 있는 인생의 길이를 생각해 본다. 10년일까? 20년일까? 그래서 어느 날 한쪽 편이 훌쩍 먼저 영원에의 여행을 떠나간다면 남은 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때때로 잡지에서 아내를 잃은 외로움을 쓴 수필을 읽는다. 수필을 쓰고 수양이 되고 연령이 높아진 사람도 외로운 심정을 안에 가두어 두기는 괴로운 모양이다. 그 수필을 읽으면 동정과 이해와 공감을 한다. 그러나 수필을 쓴 사람뿐 아니고,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나 자신의 일처럼 적막해진다.

밖에는 달이 밝다. 성장한 아들딸들은 다른 방에서 깊은 잠에 떨어졌다. 넓은 우주 공간에 나와 아내만이 남아 있다는 공허감이다. 나는 베개를 당겨서 자리에 눕는다. 잠이 곧 올 것 같지 않다.

어디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여름이 깊어진 모양이다. 또르륵 또르륵 또르륵! 한참 동안을 울더니 뚝 그친다. 귀뚜라미도 무슨 생각을 해 보는 모양이다. 다시 또르륵 또르륵 하면서 울어댄다. 밤이 외로워진다.

  1. 金時憲 : 아호 無圓(1925.9.17~2014.8.27) 경북 안동 임하 출생. 경북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 졸업. 경기전문대학 강사. 1965년 『現代文學』에 작품 ‘私談’으로 등단.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수필문우회 회원. 문화센터·도서관 수필창작 강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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