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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내가 사랑한 반말족 / 성석제

부흐고비 2020. 3. 16. 12:46

내가 사랑한 반말족 / 성석제


이 세상에는 또, '반말족'이라는 부족이 있다

이 부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반말을 하도록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오지 중의 오지에서 그 훈련을 받은 반말족 아이를 내가 실제로 목격한 바, 제 아버지에게 '아부지, 니 밥 먹으란다' 하러 나왔다가 처음 보는 어른에게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니 여까지 말라꼬 왔나' 하고 검문까지 한다. 이 반말족은 전국 각지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내가 비교적 최근에 만난 반말족을 소개해 볼까 한다.

요즘 내가 작업실을 지어놓고 이따금 들르는 시골은 밤 아홉 시만 되면 온통 캄캄해지고 인적이 드물어진다. 면사무소가 있어 면에서 제일 번화한 곳 역시 노래방 하나와 슈퍼마켓을 제외하면 불빛조차 드물어 쓸쓸한 생각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번은 차를 길가에 대놓고 쓸쓸함을 위로해 줄 맥주 따위를 사려고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졸린 눈을 한 주인이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비닐봉지에 넣어주는 물건을 들고 나왔더니 차가 없어졌다. 다행히 머잖은 곳에 경찰차의 경광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제복 차림에 건들거리며 순찰차로 가는 사내가 있어서 그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사내가 돌아보는데 나오는 말이 대뜸 반말이었다.

"나 말이야?"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반말족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혹시 여기에 세워뒀던 차 못 보셨나요?"

"저기 있잖아."

사내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내 차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길 반대편으로 돌려져 있었다. 나는 내가 세워둔 자리를 착각했나 생각하고는 차로 가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보던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거 당신 차 맞아?"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느닷없이 언성을 높여 내가 차를 제대로 주차하지 않고 열쇠를 꽂아둔 채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곤 한 손에 내 차 열쇠를 꺼내들고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차는 지체 없이 도난을 당했을 것이며 반드시 범죄에 이용되어 평화로운 치안질서를 어지럽히게 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내가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시간이 오 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차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차가 도난을 당할까 염려하는 한편, 그 차에 올라타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세우고 문을 잠근 뒤, 차 주인이 오기까지 기다려 준 여러 가지 배려에 대해 감사하다고 정중히 말한 다음 열쇠를 돌려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열쇠를 쉽게 돌려주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이야? 어디 살어?"

비로소 내게 어떤 느낌이 왔다. 앗, 반말족이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확인을 했다. "저는 그냥 면민입니다. 따라서 이 면에 살지요. 아저씨는 누구시죠?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전에 제가 살던 깊은 산 속에 살던 사람들과 혹시 한 집안이 아닌가 해서 그럽니다. 성함은? 본관은? 고향은?"

"지금 공무집행 중인 경찰에게 장난하는 거야, 뭐야?"

"앗, 경찰이셨나요? 정모를 착용하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본 적이 없어서 몰라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경찰은 근무 중에 반드시 이쑤시개를 물고 시민을 상대하라는 규칙도 새로 정해졌나요?"

그는 눈을 치켜떴다.

"어라. 이거 이제 보니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고 트집을 잡네?"

"아까 고맙다는 인사는 드렸습니다. 아, 그 인사는 인사가 아닌가요. 무슨 뇌물을 바라시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러자 그는 그렇지 않아도 새우처럼 가는 눈을 한껏 가늘게 뜨더니 면허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에게 먼저 경찰 신분임을 확인시켜 달라고 했다. 그는 면허증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나 역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그가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한 내 면허증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 하면서 다른 경찰을 불렀는데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우리에게 다가온 근무자는 근무 복장이 완벽했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존대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면허증을 내밀었다. 그는 무전기로 내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확인 한 뒤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이제 보니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애처럼 딱딱거리고 그러셔. 나하고 동갑이구만."

반말족은 그제야 말투를 조금 바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겉보기로는 나보다 서너 살은 더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그에게 다 확인했으면 열쇠를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열쇠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법대로 하면 당신은 딱지를 끊어도 할 말이 없어. 내가 다 한 동네 사람이라 봐줄라구 그런 건데 그렇게 복장 따지고 반말 한다고 따지고 그러는 게 아니지. 차가 있으면 단가. 제대로 간수를 할 줄 알아야지 말이야."

나는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건 뒤, 유리창을 내리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자, 그럼 계속 근무해."

그는 뜻밖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하고는 한 집안이야. 나중에 종친회에서 보자구."

그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 있는 사이에 나는 유유히 차를 몰아 작업실로 향했다. 다음날, 나는 우연히 그와 면사무소 앞에서 마주쳤다. 내가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묻자 그는 깍듯이 존댓말로 대답을 했다. 나도 질세라, 도움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했더니 그는 경례까지 붙였다. 그 뒤로 우리는 몹시 친해졌다.

< 참고 : 반말족을 만났을 때의 대응법>
1) 본인이 반말족일 경우 함께 반말을 함으로써 한핏줄임을 확인시킨다.
2) 본인이 반말족이 아닐 경우에는 무조건 큰소리로 상대한다. 반말족의 라이벌 부족으로는 '목청 큰 놈이 이긴다' 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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