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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얼굴 / 안병욱

부흐고비 2020. 3. 15. 09:13

얼굴 / 안병욱


사람은 저마다 정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착하고 품위 있는 얼굴의 소유자도 있고, 흉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이도 있다.

우리는 자기의 얼굴을 선택하는 자유는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얼굴이다. 재주나 체질과 마찬가지로 운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누구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기를 원한다. 추하고 못생긴 얼굴을 바라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자서전적 작품을 읽어 보면, 젊었을 때 자기의 코가 넓적하고 보기 흉한 것을 무척 비관하고 염세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젊었을 때에는 특히 자기 얼굴의 미추에 대해서 유별한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젊은 여자일수록 더하다. 얼굴의 근본 바탕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운명적으로 결정되지만, 우리는 자기의 성실한 노력에 따라서 제 얼굴을 어느 정도 고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좋은 얼굴을 가져 보려고 정성껏 애를 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달라지는 법이다. 물론 한두 달의 노력으로 될 일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10년쯤 성의껏 애쓴다면 얼굴은 분명히 달라진다. 한 가지의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오랫동안 애써 온 사람의 얼굴에는 어딘지 범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감돈다. 그것은 안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빛이다. 위대한 예술가나 탁월한 학자나 고매한 종교인의 얼굴에는 분명히 환한 빛이 있고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다. 그것은 좋은 꽃에서 발하는 그윽한 향기와 같다. 감출래야 감출수가 없는 일이다.

링컨은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깊이 생각하고 음미해 볼 만한 말이다. 일생을 무책임하게 살아 온 사람의 얼굴에는 어딘지 무책임의 그림자가 서린다. 진실하게 살려고 한결같이 노력한 사람의 얼굴에는 분명히 진실의 표정이 깃들인다. 화류계에서 오랫동안 윤락한 인생을 산 여성들의 얼굴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해도 요(妖)와 속(俗)과 비(卑)의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처음에는 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얼굴의 표정이 그렇게 굳어지고 만 것이다.

사람이 마음속에 악의를 품고 있으면 벌써 얼굴에 그것이 새겨진다. 우리의 마음이 질투의 감정에 휩쓸릴 때 얼굴 근육이 질투의 표정으로 이지러진다. 악의와 질투의 감정과 표정을 한두 번이 아니고, 수백 번 수천 번을 가진다면 스스로 얼굴에 보기 흉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얼굴을 매일같이 조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 그만큼 진실해지는 것이요, 거짓된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이 그만큼 흉한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과의 법칙에 속한다.

도산 선생은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강조하였다. 한국인의 표정이 저마다 빙그레 웃는 얼굴이 되기를 원하시고 한국 사회가 훈훈하고 화목한 사회가 되기를 바랐다. 도산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전국에 미소 운동을 일으키자는 생각까지 하셨다.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 이것이 우리가 갖고 싶은 새 사회의 모습이요, 새 나라의 표정이다. 갓난아이의 빙그레, 젊은이의 빙그레, 늙은이의 빙그레, 모두 다 인생의 아름다운 표정이다. 한국 사람의 모든 얼굴의 입언저리마다 눈시울마다 부드러운 미소의 표정이 떠오르기를 그는 원했다. 도산은 그가 살던 송태 산장 입구의 문에다가 '빙그레' 또는 '벙그레'라고 써 붙이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에 화목한 미소를 짓기를 원하였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간절히 느낀 것은 우리 한국 사람은 미소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는 섭섭한 감정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미소의 덕을 갖는다. 그들은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고, 우리는 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한문에 일소일소요, 일로일로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그만큼 마음이 짊어지고 한 번 노하면 그만큼 마음이 늙어진다는 것이다. 성나면 분명히 심신에 해롭고, 웃으면 확실히 심신에 이롭다. 산중의 호젓한 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서로 만났을 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다. 기차에 마주 앉게 된 손님끼리 서로 간단한 미소를 지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부드러워지는지 모른다. 착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훈훈한 미소, 그것은 지옥을 천국으로 화(化)하는 힘을 갖는다. 직장에서 노상에서 또는 차 중에서 미소의 꽃을 피우자. 우리는 서로 미소하는 훈련을 하고, 미소하는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아름답고 명랑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저마다 미소의 덕을 배우자.

한국의 역사는 전란과 가난과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역사는 물심(물질과 정신)의 유산을 남기면서 흘러간다. 역사가 눈에 보이는 문화적 유산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놓는다. 전란과 가난과 고난의 긴 역사는 우리의 마음에 숙명론의 지문을 남겨 놓았고 우리의 얼굴에 체념의 표정을 새겨 놓았다. 웃음이 없다는 것은 생명의 맥박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념의 굳은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생활의 깊은 호흡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얼굴을 갖도록 힘쓰자. 좋은 얼굴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착한 마음씨로 진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은 그가 가지고 있는 덕의 일부다."라고 미국 여류 작가 올코트는 말하였다. 그 사람을 알려거든 그 얼굴을 살피면 된다. 얼굴은 그 사람의 과거의 생활사의 결론이요. 오랜 정신사의 기록이다. 어떤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어떤 화가가 천사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목이 수려한 한 소년에게 그것을 발견하고 그를 천사의 모델로 그렸다. 수십 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이 화가가 악마의 얼굴을 그리려고 모델을 찾다가 어떤 흉상의 늙은이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를 악마의 모델로 그렸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악마의 모델은 수십 년 전에 그린 그 천사의 모델과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고 아마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내포된 상징적 의미와 교훈은 심원하다. 그 모델의 수십 년에 걸친 타락적 생활은 아름다운 천사의 얼굴을 드디어 추악한 악마의 얼굴로 변하게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심소작(有心所作)"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오직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착한 마음을 품고 일생을 꾸준히 노력하고 수양하는 범부도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악한 마음으로 타락의 생활을 계속하면 천사의 얼굴도 악마의 얼굴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인생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내 소작이요, 천사의 얼굴을 짓게 하고 악마의 얼굴을 짓게 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힘쓰면서 살아가려는 것이 종교다.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다고 예수는 말하지 않았던가. 불교에서는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얼굴은 인생의 최고의 예술품에 속한다. 단아하고 기품이 높은 얼굴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예수의 얼굴에서는 분명히 빛이 발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석가의 얼굴은 그저 대하기만 해도 마음의 흡족과 위로를 받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위대한 종교의 개조(開祖)가 된 것이다. 우리네 같은 범부는 석가나 예수의 얼굴과 같아질 수는 없다. 그러나 참된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우리 얼굴도 무척 진실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저마다 좋은 얼굴의 주인공이 되자. 날마다 자기의 얼굴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생활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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