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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착각의 늪 / 박하

부흐고비 2020. 7. 31. 23:45

늪의 종류는 많다.

슬픔, 나태, 후회, 실망, 고통, 침체, 불면, 죽음, 착각…의 늪이 있다. 어떤 단어에 늪만 부치면 될 만큼 늪의 이름은 다양하다. 나는 ‘착각의 늪’에 빠지곤 한다.

편지를 쓰고 나니, 벌써 저녁이다. 우체국 마감시간 전까지 가려고 하니 마음이 급하다. 열흘 앓은 환자처럼 창백한 맨 얼굴로 외출할 수 없기에, 분홍색 립스틱을 칠하니 그나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청치마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는다. 티셔츠의 앞부분과 소매 끝이 오색의 꽃으로 수놓여 있어, 시골집 꽃밭을 떠올려주기에 즐겨 입는 옷이다. 받쳐 입고 수십 통의 편지봉투를 경쾌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선다.

우체국에 들어서니 남자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우표를 달라고 부탁하며 직원 앞에 서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드니, 담당 직원이 날 쳐다보며 미소를 짓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인다. 왜 미소를 지은 걸까. 내 모습이 우아해서일까. 틀림없이 나한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우체국을 자주 애용하는 고객이라 고마워서 그럴까. 혹시나 전에 수필집 한 권을 주어서 그 답례로 차 한 잔 사 주고 싶은 걸까. 두세 살 연하로 보인다. 차 한 잔을 사주고 싶은 걸까. 요즈음은 연하의 남자가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세대풍조 아닌가. 갑자기 자신이 열아홉 살 처녀처럼 가슴속에 복사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딱하다.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까봐 말 못하는 걸까. 용기 없는 숙맥이지만 오히려 그러한 순수한 면이 마음에 든다. 아쉬운 마음으로 우체국을 나온다.

해거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한국여성의 표준체격이라 참해서일까. 상가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치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정겹다. 아직도 자신의 외모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앞으로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겠다는 생각하니 뺨이 붉어진다. '연인'의 여자 주인공 마그리뜨 뒤라스는 아들 같은 청년하고 사랑하지 않았던가. 어느새 내 마음은 파란 하늘에 애드벌룬처럼 둥둥 떠간다. 그 남자 직원이 만나자고 하면 거절할까, 응할까. 행복한 고민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초록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여대생으로 보이는 웬 숙녀가 내게로 사뿐히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저어 아줌마, 티셔츠 거꾸로 입었네요."

순간! 재빨리 살펴보니 거꾸로다. 소매와 옆구리에 불거진 솔기며 마구 헝클어진 오색의 수실들이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엉켜있다. 얼굴이 화덕처럼 달아오른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꼭꼭 숨어버리고 싶다. 세상에 어디 여자가 칠칠하지 못하게 옷을 거꾸로 입고 활보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의 당당함과는 달리 행여나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뒷동산의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한다.

아까 우체국 직원도 내 모습을 보고 옷을 거꾸로 입었다는 말을 해주려다가 상대방인 내가 무안해할까 봐 말해주지 못했나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스스로 착각에 사로잡혔단 말인가.

문득 며칠 전, 친구의 얘기가 생각난다.

중요한 모임이 있던 날, 친구가 약속 장소에 가니 거기 참석한 부인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보더란다. 친구는 속으로 자신이 예뻐서이겠지 여기며 테이블로 가서 우아하게 앉았단다. 축배의 잔을 들고 크리스털 잔에 살짝 입술을 적신 후, 무심결에 귓가를 만지던 친구는 깜짝 놀랐단다. 둥근 모양의 금 귀걸이를 양쪽 귀에 달고 외출했는데, 한쪽 귀걸이가 사라지고 없더란다. 연예인도 아닌 가정주부가 버스 손잡이만 한 귀걸이를 한쪽 귀에만 달고 나타났으니 다른 여인들이 놀라며 관심을 가지고 쳐다 볼 수밖에….

사람들은 모두 제 잘난 맛에 사나보다. ‘백설공주’의 요술거울에 주술을 거는 여인은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의외로 상당수 많은 것 같다. 친구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둘은 미美의 안개 속 미로를 즐기는 범주에 속한다고나 할까. 허지만 착각의 늪에 빠진 순간은 행복했다. 불륜의 늪은 한 번 빠지면 수렁이 되어 빠져나오기 힘들지만, 착각의 늪은 아무리 깊게 빠져들어 가도 상상에 그칠 뿐 곧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사모님, 착각은 자유이니 마음껏 하세요.”라고 속삭여준다. 또다시 착각의 늪에 빠지려 한다.

그대여, 그대는 아직도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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