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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세 컷의 뒷모습 / 김애자

부흐고비 2020. 8. 22. 17:45

얼마 전 ‘범부일지凡夫逸志’란 책을 받았다. 희수 기념문집으로 낸 책의 뒤표지에 실린 사진 한 컷이 시선을 끌었다.

사진은 그늘진 전각을 배경으로 텅 빈 마당을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저자의 뒷모습이다. 성근백발에 키가 훤칠하고 몸집은 다소 우람한 편인데, 등과 어깨는 약간 수굿이 굽었으나 어디엘 가도 아직은 꿀릴 게 없다는 당당한 기개가 엿보인다. 다만 발뒤꿈치에서부터 시작된 작달막한 그림자만이 ‘인생살이란 결국은 허황한 놀이’란 다소 코믹한 모션으로 주인을 따라가고 있다.

저자도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는가, 사진에 대한 설명을 <뒷모습>이란 글속에다 밝혔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 출가수업’을 받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몰래 찍어 간직해 두었다가 5년이 지난 뒤, 출가동문회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전해 준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처음 받았을 때는 꼭 숨바꼭질을 하다 술래에게 덜미를 잡힌 것 같더라는 그 분의 고백이 산울림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어쩌면 인생살이란 그 분의 말씀처럼 술래놀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고단한 여정의 끝에 이르러선 마침내 저 어릿광대와도 같은 그림자마저 지우고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한 생이 아닌가 싶다.

문득 내 안에 깃들어 있는 한 컷의 사진이 떠오른다. 그 사진은 엷은 황토 빛 모래 언덕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선승의 뒷모습이다. 어머니 장례를 모시고 돌아와 사이버공간에 마련해 놓은 우편함을 열었을 때 문상을 다녀간 지인이 보낸 짤막한 위로의 글과 함께 첨부해 보냈던 것이다. 사진 속의 선승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져 있지 않았다. 호린 몸매에 삭발한 머리두성 또한 왜소했다. 황혼이 내릴 무렵이었던가, 선승의 발끝에는 그림자도 따라붙지 않았고, 사구砂丘는 단단하게 굳어져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옷자락을 나부끼며 모래 언덕 저 너머로 멀어져가고 있는 선승의 뒷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혼령처럼 느껴진 때문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저 무인지경을 어머니도 홀로 가고 계실 터였다. 명치끝에 매달려 있던 울음주머니가 출렁 흔들렸다. 통렬한 슬픔을 속으로 감춘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문상객들은 천수를 누리시어 호상이라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는 만큼 외로우셨다. 90을 넘기고부터 귀마저 어두워져 보청기를 끼워 드리면 ‘왕왕’ 쇳소리 나는 것이 싫다고 손사래를 내 저으셨다. 본능적인 요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던 어머니는 98세에 이르러서야 술래놀이에서 놓여나셨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란 슬픈 일이다. 핏줄과의 이별은 더 아프다. 빈자리에 남아서 부재와 상실에서 오는 허무감에 사로잡힌 내게 표표히 사막을 걸어가는 선승의 뒷모습은 어머니의 혼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나는 1년 가까이 황사가 이는 바람 속으로 가뭇없이 멀어지는 어머니를 향해 두 팔을 내저으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다가 제소리에 소스라쳐 깨고는 했다.

객승의 뒷모습을 찍은 또 한 컷의 장면도 지울 수 없다.

우리 내외가 사십대 중반에 들어섰을 무렵이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늦은 밤, 남편은 객승 한 분을 달고 왔다. 퇴근길에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는 스님의 뒷모습에 이끌려 함께 받거니 주거니 마시다가 한밤중에 그를 달고 들어왔던 것이다.

객승은 키가 컸다. 30대 중반 쯤은 되었을 그는 왼쪽 눈언저리에 잉크가 번진 것처럼 푸른 점이 넓게 퍼져있었다.

아이들 방에 자리를 깔아주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하룻밤 편안하게 묵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이 그를 위한 배려일 터였다.

잠결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를 보니 네 시 반이었다. 곧이어 대문에 달린 빗장이 소리를 냈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나갔을 터이련만 육중한 대문은 객승의 출타를 모른 척 눈감아주지를 않았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으나 성근 빗방울은 여전히 추적거리고 있었다. 우산을 찾아들고 성급히 나갔으나 그는 가로등이 졸고 있는 골목어귀를 돌아가고 있었다. 첫차를 타기에도 이른 시각이었다.

바랑을 지고 가던 그의 뒷모습이 오래 남아 있다. 그가 짊어진 걸망 속에는 알에서 부화하지 못한 병아리의 정체성과 혼란스러움이 깃들어 있었을 터였다. 깨달음이란 고지를 향한 막막함과 젊은 핏속으로 스며드는 처절한 고독과 갈증이 방황을 부축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기막힌 성장의 촉구였던가. 빈손으로도 사막을 걸어갈 수 있는 구도자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길 찾기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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