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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1mm의 차이 / 강숙련

부흐고비 2020. 8. 22. 17:46

“어깨의 압통이 심한 환자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멍'을 찾았다. 손톱으로 눌러가며 침 끝을 목표지에 제대로 갖다 대고 쏘았다. 곧 통증은 줄었다고 하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과감하게 뺐다. 다시 더듬더듬 그곳에서 1mm 떨어진 지점에 침을 쏘고 증상을 물어보니 통증이 조금 더 줄었다고 한다. 이 조그만 차이가 환자의 증상에 큰 변화를 나타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로 만족해 버렸다. 다시 정확한 혈 자리를 찾아 한 번 더 시침했더라면 그 분의 증상이 훨씬 개선되었을 텐데 조금 후회가 된다. 진료소에서 침을 놓을 때도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취혈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예다. 대가리를 땅에 꼬라박고 정성을 들이면 환자의 만족도가 다르다. 이제는 그 1mm의 차이를 위해 열심히 대가리를 땅에 꼬라박아야겠다.”

아들의 책상 위에서 주워 읽은 메모의 내용이다. 무릎의 3촌 아래, 정강이뼈 바깥 큰 근육의 움푹한 곳 족삼리足三里 혈이나, 오금 안쪽 음곡陰谷 혈을 찾기 위해 매번 깊숙이 꼬라박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1mm 차이'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지 종종 어미를 실험도구로 삼는다. 더듬거리는 새끼의사 앞에서 어미는 마루타가 된다.

훈련이 스승이다. 매도 맞을수록 이력이 생긴다더니 횟수가 거듭되면서 어리보기 아들보다 마루타어미가 먼저 도를 닦는 것 같다.

“아따 거기 말고 조금 위에다 놔 봐라. 그래, 잘 들어가지? 좋아, 하나도 안 아프다.”

“예, 이번 거는 제대로 들어갔어요.”

누가 의사이고 누가 환자인지, 둘은 마주보며 웃는다. 간혹 진료소에서도 그런 풍경이 벌어진다고 한다. 침을 많이 맞아본 어르신들은 자신의 혈 자리를 대충 알고 있단다. 그러나 아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1mm의 차이'의 진실이다.

사람 사이에도 혈 자리가 있다. 근육과 근육 사이에 움푹 파인 곳이 존재하듯 '너와 나' 사이에도 정精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찾지 못해 우리는 얼마나 전전긍긍하는가. 눈만 뜨면 만나는 사이에도 그곳을 찾지 못해 종종 티격태격한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혈 자리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자리가 그곳이다.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는 마음과 마음 사이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모임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사고 말았다. 뭉치고 결린 통증이 못내 불편하다. 이럴 때 침 한방 직통으로 맞고 싶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혈은 쉽게 자리를 내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직방으로 쏘아주는 사람도 없다. 모두들 어슷비슷 '1mm'의 진실 밖에서 아픔으로만 존재한다.

서로 좋았을 때는 그 1mm의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감정이 상하고 나면 사람 사이의 혈 자리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혈이 통하지 않으니 당연히 독소가 쌓여 아프고 괴롭다. 이 불편한 통증은 좀처럼 해소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진실과 오해의 경계가 1mm의 차이라는 사실 앞에 더 목이 멘다.

병은 자신이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나의 병은 내가 만든 것일 게다 하지만 자꾸 변명이 하고 싶다. '1mm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그게 아니라고, 내 진실의 자리를 그곳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다. 좀 더 아래로, 좀 깊은 곳에, 아니면 방금 스치고 지나간 그 자리가 진실의 혈이라고 말 해 주고 싶다.

차라리 내 손으로 그곳에다 침 한방 화끈하게 찌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대가리를 꼬라박고서라도 오해의 중심에 진실의 침 한방 되게 맞고 싶다. 건강한 사람의 혈은 숨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치료가 필요한 사람의 혈은 동전구멍 만큼씩이나 열려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치료가 필요한 사람, 내 마음의 혈 자리를 진즉부터 직방을 고대하고 있다.

늦은 밤, 반쯤 열린 문을 들여다보니 아들은 제 발들에다 침을 놓으며 공부에 열중이다. 나는 거실로 주방으로 괜히 어슬렁거린다. '1mm의 차이'에 침 한방 맞을 궁리로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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