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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돼지꿈 / 김수자

부흐고비 2020. 8. 24. 15:15

모든 것은 미운 눈으로 보면 밉게 보이고 고운 눈으로 보면 한없이 곱게 보이기 마련인가. 직업 탓인지는 몰라도 돼지에 관한 한 내 눈에는 예쁜 짓만 보인다. 돼지라면 뭐든지 좋다 보니 멱딴다는 울음소리도 우렁차게 들리고 그 냄새 또한 거슬리는 일이 없다. 친정엄마처럼 분만을 돕고 청소를 해주다가 나도 모르게 쓴웃음 지을 때가 있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돼지를 보듯 좋은 점만 보고 있는지,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나 한지 때로 내 자신이 의문스러워진다.

돼지의 여러 예쁜 점 중에서도 우선 무욕無慾의 경지가 돋보인다. 제 배가 차면 그뿐 남의 것을 넘보지 않는다. 온갖 불행의 시초는 더 가지려는 데서 비롯되지 아니하던가. 다음으로 그 정직성이 돋보인다. 먹은 만큼 자라고 사랑 받은 만큼 돌려준다. 거짓을 모르는 놈들이다. 재주를 부리거나 꼬리를 치지 않는다. 생긴 대로의 투박함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지극한 모성母性으로 나를 감복시킬 때가 있다.

이런 돼지가 사람들에게서 웃음거리가 될 때 나는 속이 상한다. 돼지의 추한 생김새가 웃음거리가 되고 미련스런 행동거지가 천대를 받는다. 돼지 값이 뚝 떨어질 때는 기분이 말이 아니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거나 멸시당하는 기분이다. 글 속에서도 ‘돼지같이 미련한 놈…….’ 등의 구절을 대하면 괜스레 열이 오른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가난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을 사람들은 즐겨 쓴다. ‘배만 부르면 다냐? 생각할 줄도 알아라.’는 고상한 교훈을 담고 있다. 돼지에 대한 지독한 야유며 힐난의 경구라고 하겠다. 돼지가 말을 한다면 하고 싶은 말이 태산을 이룰 것 같다. 맨 처음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을 향해 말문을 열지 않을까.

이런 천대꾸러기가 삼삼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다. ‘삶은 돼지머리’나 ‘돼지꿈’이 그것이다.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거나 큰일을 계획할 때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찾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의 준공식에, 상량식에 또는 고사상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돼지머리다. 돼지머리는 고액권 지폐를 잔뜩 물고 높은 사람들의 절을 받고 있다. 연전, 미국의 항공우주기지에서 ‘무궁화 2호’를 쏘아 올릴 때도 돼지머리 사다놓고 고사를 지냈다는 기사를 보았다. 미국에서는 돼지머리를 팔지 않아서 바비큐용 통돼지를 구해다 놓고 절을 했단다. 무궁화 1호가 실패했던 이유가 돼지머리고사를 지내지 않아서 그랬다는 후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돼지같이 미련한 놈아’ 하고 깔보던 사람들도 그저 처분만 바란다는 듯 절을 해댄다. 더럽다고 퉤퉤 침을 뱉던 사람들도 주저하지 않고 무릎을 꿇는다. 욕심꾸러기라고 욕하던 사람들도 복 달라고 손을 비빈다. 복 받으려면 돼지머리 앞에 절하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다. 아무도 소크라테스 앞에서 그런 소원을 빌지 않는 게 이상하다. 껍데기 하나에 수백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밍크나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아닌 것이 이상스럽다.

평소 얕잡아보던 오만함은 어디로 가고 무사안일, 만사형통을 빌고 빈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돼지머리는 복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듯 빙긋이 웃고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열쇠라도 감추어놓은 듯 의미심장한 웃음이다. 돼지머리 앞에서 넙죽넙죽 절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우리 집에 지천으로 있는 돼지가 좋은 대접을 받아서 그렇다. 돼지는 한 번 절을 하거나 꿈속에서 슬쩍 스치기만 해도 복이 굴러들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다. 그래서 돼지꿈을 꾼 사람들은 복권을 사거나 횡재수를 기대한다.

나도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돼지꿈을 꾸고 싶다. 돼지 값이 떨어져서 죽을 쑤고 있을 때는 그 놈의 꿈이 더욱 간절해진다. 밤낮으로 수천 마리의 돼지 속에 묻혀 사니까 꿈에 자주 보일 것 같은데, 그래서 제 놈 때문에 빚진 사료 값이 복권 한 장으로 뚝딱 넘어갈 것 같은데 영 나타나주질 않는다. 30년 넘게 돼지를 키우면서도 돼지꿈은 딱 한 번 꾸었다. 꿈 자랑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지만 받을 복을 충분히 받았기에 나는 꿈 자랑이 하고 싶다.

어느 해 첫 날에 나는 그 꿈을 꾸었다. 더러운 웅덩이에 새끼돼지 열 마리가 빠져 질식해 있었다. 귀한 순종들이었다. 꿈속에서 그놈들에게 인공호흡을 했다. 나는 인공호흡의 기술을 알고 있다. 태어날 때 어미 뱃속에서 질식해 나오는 놈들에게 인공호흡을 해준다. 사람에게 하듯 깨끗한 천을 코에 씌우고 숨을 불어넣었다. 처치가 끝났을 때 열 마리의 새끼돼지들은 거짓말 같이 생기를 찾고 깨어났다. 그 해에 굴러든 행운은 이루 다 들먹일 수가 없을 정도다. 그건 바로 칠거지악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태몽이었고, 숙원이던 전화가 개통되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돼지 값이 급등하여 사채를 정리하고…….

나는 요즘 돼지꿈을 한 번만 더 꾸고 싶다. 제2의 IMF라고 너나없이 기진맥진해 있는 때에 묘책은 돼지꿈을 꾸는 일이 아닐까. 아니면 돼지머리 하나 삶아 놓고 꾸벅꾸벅 절을 해대고 싶다. 그놈이라면 늘어나는 청년실업자 구제쯤이야 누워 떡먹기일 텐데. 하지만 놈은 좀처럼 꿈에 보이지 않는다.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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