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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억새 / 최민자

부흐고비 2020. 9. 30. 19:25

너무 깊은 슬픔은 눈물이 되지 못한다.

말을 입어 시가 되지도, 소리를 입어 노래가 되지도 못한다. 몸 속 어디, 뼛속이거나 자궁이거나 췌장 담낭 깊은 속에 날 선 유리로, 깨진 사금파리로 박혀 영혼의 압통점을 무자비하게 가격한다.

사람의 내면에 슬픔의 안개가 가득하면 눈빛으로 온 몸으로 슬픔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슬픔에도 반감기가 있어 봄 햇살에 천천히 바래지거나, 가을 빗소리에 녹아나오거나, 깊은 밤 뒤척이는 베갯머리에 어둠침침한 꿈으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끝끝내 증발하지 못한 슬픔의 흰 뼈들은 육신과 함께 순장되어 흙속에 파묻힌다. 살아있는 것들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흙, 세상에 흙처럼 무정한 것은 없다. 흙에 덮이면 모든 것이 무효다. 순간의 기억도, 투쟁의 역사도 속절없이 무화되어버린다.

무른 살들 푸실푸실 흙이 되어 물러가버려도, 캄캄하게 삭아 없어지지 못한 슬픔의 낱알들은 빈 들 강 언덕에 서리서리 돋아난다. 칼끝 같은 적의도, 가슴 속 불잉걸도, 나는 노을로 번져 올린 풀들이 야위고 휘어진 목줄기로 그을음 같은 한숨을 뱉는다. 목쉰 바람 갈피갈피 일렁이는 구음 사이로 풍화된 슬픔의 날벌레들이 은빛으로 자욱하게 춤을 추며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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