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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청량대운도에 들다 / 김치주

부흐고비 2020. 10. 6. 14:58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청량대운도는 봉화의 청량산을 옮겨놓은 진경산수화다. 무려 넓이가 46m, 폭이 6.7m나 되는 세계 최대의 그림이다. 야송미술관에 걸린 이 풍경화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살펴보려면 적어도 100보의 걸음을 떼야 겨우 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대작이다. 이원좌 화백이 2m의 장대 끝에 붓을 매어 혼신으로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완성했다는 청량대운도, 그 속에 나는 지금 한 점이 되어 서 있다.

그림은 청량교를 막 지나는 모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 하나가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모자가 무슨 깊은 사연을 안고 깊은 산길을 가려 하는가, 얼핏 산마루턱에는 청량사 절 지붕이 보이는 것도 같다. 두 모자가 거길 가려는가.

나는 어른들의 명을 받아 남편 얼굴도 못 본 채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이라고 용두산 공원에 올라 한나절 벤치에 앉았다가 배가 고파 음식점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난 남편은 알약을 한 움큼 털어 입에 넣었다. 그때 비로소 얼굴도 못 본 신랑이 어린 시절부터 지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이 캄캄했으나 어쩌랴. 물릴 수도 없이 닥쳐온 운명인 것을.

어찌어찌하여 첫 아이를 가져 산달이 되었다. 골골거리는 남편의 한약을 지으려고 내외가 길을 나섰다. 있는 돈을 모아 약을 짓고 나니 십 리 길 차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부축하고 걸어야 했다.

그때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차비가 없어 걸어가야 합니다.”

택시는 가버렸다. 잠시 후 그 택시가 돌아와 우리 옆에 섰다.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우리는 차비가 없어 걸어갑니다.”

그 먼 길을 갈 수 없으니 아저씨가 타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병원에 출산하러 가시는 줄 알았는데 남편이 편찮으시네요.”

아마도 기사 아저씨는 배가 남산만 한 내가 출산하러 가는 줄 알고 도와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신혼 초의 삶이 막막하였다. 먹을 것이 없었다. 병든 남편을 봉양하며 아이를 키울 길이 막막했다. 내가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하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업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비볐다. 건축 일을 따라다니다 보니 땅만 있으면 집을 짓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어떻게든 내 집 한 칸 지어 보겠다는 욕심이 섰다.

땅을 사기 위해 친정집에 돈 빌려달라고 가는 발걸음은 문턱에 오르기 전 스멀스멀 불안감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아버지께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조 서방 약값이 없어서 왔느냐?”고 물었다. 아니, 땅을 사서 집을 짓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시며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은 무슨 집” 하시며 그 자리에서 돌려세웠다.

그때 돌아가면서 이곳 청량산에 딱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청량교 다리를 건넌 적이 있었다. 저 그림 속의 풍경처럼 아들을 업었다가 걸렸다가 손을 잡고 산길을 올랐다. 길은 가팔랐다. 내 슬픈 앞길처럼 숨을 헉헉거리게 했다.

앉았다가 걸었다가 하염없는 걸음 끝에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청정 도량 청량사가 나와 아이를 맞았었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대웅전 ‘유리보전’ 앞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중생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번뇌로 허덕일 때 지극 정성으로 소지를 올린다면 한 번은, 꼭 한 번은 들어준다는 여래상 앞에서 나는 지아비의 병을 빌었고, 이 아이의 부디 무운 장구하기를 기원했다. 대문장가 최치원이 공부했다는 독서대 앞에서 아이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한 푼 없는 가난뱅이 나에게 누가 돈을 빌려줄까, 그것도 거금이 들어가는 집을 짓는 건축비를. 구름 너머 연화봉을 우러르며 나는 눈물지었다.

길은 있었다. 유리보전 여래상이 한 번은 살려주신다더니 내려오는 그 길로 서문시장 신용금고에서 일하는 집안 아저씨를 찾아갔다. 그분은 내 말에 귀 기울여주셨다. 적금 드는 방법으로 돈을 빌려 가고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저당 잡혀 상환하면 된다는 바늘구멍 같은 길을 가르쳐 주셨다. 아저씨가 사주는 물국수 한 그릇을 눈물로 말아먹고 나는 용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밤낮이 따로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형편에 맞는 땅을 보았다. 푹 꺼져있는 땅에 눈이 내려 덮여 있는 갈대가 뒤엉켜 있었다.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교재를 펼쳐놓고 공부를 했다. 지적등본을 보고 땅의 모양과 가로세로를 정확하게 맞추어 대지의 건물 비율에 맞게 청색 평면도를 구워 오는 순간 너무나 행복했지만, 그것도 잠시 걱정이 앞섰다.

땅이 꽁꽁 얼어있는 엄동설한에 건물 짓는 돈을 어디 가서 빌려오나.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아침에 남편 약을 달여 놓고, 다시 신용금고로 찾아갔다.

“건물 짓는 돈이 없으니 건물을 미등기로 설정하고 융자 내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지점장실에 들어갔다. 밖에서 조바심이 되었다. 아저씨는 나오시면서 이번이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땅 구입할 때 빌린 이자를 떼고 가져왔다. 인건비와 자재비를 주고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유리도 넣어야 하고 타일도 붙여야 했다. 몇 년 동안 밤을 낮 삼아 수출품 재킷을 만들어준 사장 집으로 밀린 노임을 받으러 갔다.

가진 자는 없는 자를 그렇게 차갑게 대하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사장은 외국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제발 나머지 돈을 달라고 바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졸리다 못해 사장은 “당장 가져가거라!” 하며 비가 내리는 진흙 바닥에 나를 밀치고 돈을 집어 던졌다. 아이를 업고 있는 채 쓰러져 얼굴과 포대기에 진흙이 범벅이 되었다.

청량대운도 속의 산길은 숲에 가려져 보였다를 거듭하고 있다. 그해 봄 가끔 소쩍새가 울던 길, 산다람쥐가 쏜살같이 앞길을 열어주던 그 길이었다. 땀과 눈물을 섞어 도량 청량사에 오르던 길이었다.

이제 눈은 청량사에 머문다. 멀리서도 전각과 탑이 뚜렷하다. 유리보전 앞에 엎드려 다짐하던 때가 스쳐 간다. 절 위로 계곡은 구름으로 덮여 장엄하기 그지없다. 구름 너머 연화봉이 우뚝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개 걷히면 내 인생도 저렇게 밝은 빛 아래 제 모습을 나타내리라.

그때 손을 잡고 오르던 아이는 40대의 중반이 되어 일가를 이루어 제 길을 간다. 내 평생 등짐이 된 남편은 여전히 옆에서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 파노라마 같은 청량대운도가 내 인생의 굽이인 양 눈앞에 펼쳐져 있다.

 

수 상 소 감

나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픈 사연을 품고 살아야 했다. 꽃이 만개하는 계절에 양가의 주선으로 낯도 모른 채 결혼을 했다. 명색이 신혼여행을 갔더니 남편이 여행 가방조차 무거워 들지 못한다고 했다.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배려 없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가방을 들고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자 남편은 한 줌이나 되는 약을 털어먹었다. 무슨 약이냐고 묻자 허리와 다리가 아프고 숨을 쉴 때면 몸이 저리고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릴 수 없는 나의 운명이었다. 나는 좌절하지 않고 남편을 보살피기로 작정했다. 내가 가장이 되어 어린아이를 업고 막노동 현장을 다녔다. 공사장 흙 위에 아이를 앉혀놓고 구슬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하루 벌이는 남편의 약값으로 들어갔다.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은 지금도 자리보전을 한다.

일흔의 나이에 아픈 마음을 의지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봉화의 청량산을 그대로 옮겨놓은 청량대운도를 보며 울컥 내 인생이 도돌이표가 되어 스쳐 갔다. 그때의 감정을 절재하며 내어 놓은 글이 고맙게도 선작에 들게 되었다. 영광스러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대구 달성 출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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