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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기 서술법 / 박영란

부흐고비 2020. 11. 23. 13:17

걸음을 멈췄다. 눈길을 잡은 것은 가게 유리창에 붙여진 메모였다. '3월 8일부터 3월 16일까지 신혼여행 갑니다. 3월 17일부터 정상 영업합니다. 죄송합니다.' 가게를 닫게 된 주인장의 이런 사정을 보자 싱긋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가던 길을 쉬 가지 모하고, 다시 글을 읽고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여 집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뭐하는 가게지? 실내는 깜깜해서 요량할 수 없었다. 몇 발자국 물러나 간판을 살폈다. 간판이랄 것은 없었고 '파스타' '피자'라고 쓴 영문의 글자들이 유리창 위쪽에 포스팅되어 있었다. 출입문도 유리를 끼운 나무틀의 미닫이문이었다. 이탈리안 음식을 파는 간이 분식집 같은 인상이었다.

A4 용지에 인쇄를 한 것도 아니고 손글씨를 써서 친절하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있는 집주인의 심정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담겨 있었다. 나 결혼한다고 동네방네 그리고 단골손님들에게 애고피고 자랑하고픈 것이 전해졌다. 감천문화마을이라는 이곳을 처음 찾은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그 기쁨이 와닿았다.

남잘까? 여잘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글귀의 여운을 계속 따라다녔다. 남자 쪽이 더 가까웠다. 결혼한다는 저 기쁨이 저렇게 밖으로 터져 나와 메아리로 들리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를 한 남성의 함성처럼 들린다. 오랜 기다림과 어려움 끝에 결혼으로 골인한 남자의 성취감이 필체에서 느껴진다. 어디로 밀월을 떠났을까? 9일의 일정이 끝나면 돌아와 더 열심히 살겠다는 즐거운 결의도 묻어 있다. 이웃들도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신혼여행'이라는 이 갑작스런 문구를 만나면서, 문득 환기되는 것들이 바람처럼 스쳐가리라.

주인장이 남자건 여자건 무슨 상관이랴. 이 사람의 이런 대화법은 어딘가에 온기가 있는 사람이다. 아마 이런 사람의 자기 서술법은 언제나 좀 더 구체적이며 좀 더 친절한 정이 묻어 있으리라. 기쁨이나 슬픔이 있을 때 자신의 감정을 건너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솔직한 유형. 뭘 물어보면 '글쎄'라는 말속에 자신의 심중을 어물쩍 넘기려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글쎄'라고 대답하는 말 앞에 서면 더는 캘 수도 더는 물을 수도 없다. 그는 그런 언어의 장벽을 치지 않는 사람일 것 같다.

그래서 호감이 간다. 길을 걸으면서 이 사람과 계속 교감을 하고 있는 나는, 그런 화법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 그런 화법 읽길 좋아한다. 가령 초보운전자들이 자동차의 뒤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는 스티커들을 보는 재미 같은 것이다. '떡두꺼비 같은 자식이 타고 있어요', '초보인데 아이도 타고 있어요', '초보라서 못 간다고 전해라' 이런 자신의 뒷모습을 달고 다니는 내용을 볼 때면, 난 이들의 사적인 감정을 읽어간다.

'Baby in Car'라는 거두절미된 메시지보다는 훨씬 풍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운전자의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의 배려를 바라는 애교 같은 으름장의 수위까지 느껴진다. 성격과 이미지가 전해지면서, 때로는 '그래,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데?'라고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지만, 모르긴 해도 차 꽁무니에 붙이고 다니는 그 서술의 힘은 분명 염력이 있을 터였다.

부산의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감천문화마을', 이곳은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을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문화'라는 말에 살짝 저항이 일어나지만, 아니나 다를까 '문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벽에 그려진 화려한 색채와 지나친 그림들 그리고 동네와 겉도는 카페와 관광 상품들. 이것이 6·25전쟁 피란민들이 정착하여 살아온 삶의 내력을 대변할 수 있을까. 분단장을 이상하게 해버린 듯한 의도된 과잉이 좀은 아쉽다.

하지만 골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들은 우리의 기억을 자극하는 뭔가가 남아 있다. 이끼 낀 담장 위로 낡은 문패가 걸려 있고, 지붕이 맞닿아 있는 처마 아래에 연탄재가 쌓여 있다. 빨간 수침이 돌아가는 계량기와 창살에 걸려 있는 하얀 운동화, 장독대 위에서 펄럭이는 빨래, 전봇대에 뒤엉켜 있는 전선들….

왠지 이 정물들은 가슴 뻐근한 그리움과 삶의 서사를 읽게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새로운 신화가 진행되는 이곳. 무엇보다 이 동네에서 처음 맞닥뜨린 '나 신혼여행 간다'고 외치는 저 온기가 오래도록 전해지는 마을이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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