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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거리에서 / 안재진

부흐고비 2020. 11. 24. 15:03

나는 가끔 거리를 쏘다닌다. 무슨 목적이나 이해가 있어 나다니는 게 아니라 정신질환자가 할 일 없이 다니는 것처럼 텅 빈 마음으로 걸을 때가 많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걷다보면 때로는 내가 보이고 세상이 보일 때가 있다.

젊었을 때는 거울 속에서만 나를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투명한 물체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더럽고 추한 곳은 다듬고, 부족한 부분은 감추거나 달리 하려 애썼다. 그러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세상을 마주하고는 거울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거울 속의 내가 형상의 존재라면 거리에서 얼비친 나는 영혼의 존재였다고나 할까.

거리에는 생명이 있고 삶이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었다. 그것들을 마주하면서 내 영혼도 다듬고 손질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치 거울을 보면서 신체의 추함을 닦아내듯 거리는 영혼의 거울인 것이다. 물론 젊을 때부터 생각한 것은 이니다. 그것도 나이가 들어서 이순이 넘어서야 간신히 어렴풋이나마 느낀 것이다. 그 느낌으로 세상을 마주하려니 너무 늦었다는 자괴가 나를 슬프게 한다.

거리에는 언제나 두 개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웃음이 있는가 하면 눈물이 있는 것처럼, 세상만사와 모든 생명은 양면의 기류 속에서 허덕이며 땀을 흘리고 있음을 보았다. 희망‧행복‧자유‧평화‧존엄 이런 것들을 절대 가치로 생각하면서 분주하게 달리고 있지만 또 다른 반대의 축에서는 추락‧불행‧압제‧종속 같은 것들이 병행하여 생명을 조롱하고 있음을 알았다. 무녀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불행을 씻어 내려고 미친 듯 신기를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은 반대의 축을 운명이듯 털어내지 못하고 시공과 관계없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정지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다.

오늘도 나는 거리를 걷고 있다. 허기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장 어귀를 돌아 나오는데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시금치 몇 움큼을 펴놓은 채 오가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갑자기 내 앞에 다가서더니 종이뭉치 하나를 불쑥 내밀며 헐값으로 줄 테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달력인 것 같았다.

길가 전자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가 요란한 걸 들으니 이맘때쯤 달력이 나돌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냥 지나칠까 하고 돌아서려는데 노인의 차림이 너무나 초라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얼마에 팔겠느냐고 물어보며 종이뭉치를 바라보았다.

포장을 한 비닐 겉면에 OO상회란 글씨가 찍혀 있고 그 옆에 상점 주소와 전화번호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노인은 물건을 구입하러 상회에 들렀다가 하나 얻어 온 것 같았다. 노인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우리 집에는 달력이 있어서”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걸어 둘 때도 없고 그냥 버리자니 아까우니” 하면서 형편 닿는 대로 주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오랜만에 사람다운 향기를 맡는 느낌이었다. 각박하고 치열한 오늘의 삶속에 그래도 속내를 드러내는 질박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매출할 수가 없는 물품이면서도 그냥 버릴 수가 없다는 생각, 자기 집에 똑같은 내용의 다른 한 개가 있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아무런 가식 없이 펴놓은 것이다. 이런 노인의 성정은 오늘날 사회가 진리처럼 끌어안고 있는 통념을 벗어나 순리에서 응시하는 것이요, 모든 삶을 넘치지 않게 절제하며 자신만이 그려놓은 생각 속에서 햇빛처럼 강물처럼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수마트라섬을 여행했을 때 그 곳 오지 원주민들과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한 바가 있다. 당시 얼핏 느낀 일이지만 그 곳 주민들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어떤 욕심이나 허세도 보이지 않는 오직 주어진 환경에 따라 바람처럼,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매를 따거나 고기를 잡아도 넘치지 않게 꼭 먹어야 할 만큼 거두는 모습, 은밀한 부분도 제대로 가리지 않았으면서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다.

나는 노인의 모습에서 낯선 섬사람들을 연상하며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런 태도가 이상하다는 듯 천 원만 주고 가져가라며 두어 번 손을 젓는 노인의 손등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그제서야 웃음을 건네며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 달력을 받아 들었다.

달력의 무게가 유난히 가벼웠다. 그만큼 마음도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이렇게 인간의 원형을 보는 듯 기쁠 때가 있다. 앞으로 며칠간은 참으로 상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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