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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뵈온 적이 있지만 기억하지는 못한다. 봤지만 인식하지 못하면 본 게 본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네 살 때 열반의 바다를 건너 입적하신 무정한 사람이다. 내 남동생이 태어난 지 오십팔일 만이었다. 나는 ‘현실 속의 안목’과 ‘의식의 눈뜸’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버지를 의식이 기억할 수 없는 유아기에 만났기 때문에 지금도 꼭 집어 뵈온 적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타인이다.

아버지를 만난 건 순전히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다. 태초의 빛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 진 것과 같이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서만 존재하셨다. 어머니의 험담으로 엮어지는 아버지의 일대기 속의 에피소드는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수필이다.

‘아버지는 시원찮은 사람’이라는 전제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넋두리 비슷한 쇠뇌 교육은 아버지를 ‘악당’으로 머물게 했을 뿐 한번도 의리의 ‘서부’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저주에 가까운 악담은 다섯 자녀의 양육을 비롯한 고생보따리를 통째로 어머니에게 던져 버리고 저승으로 훌쩍 떠나버린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어머니는 참외를 좋아 하셨다. 좋아하는 이유 또한 유별나다. 어느 여름 장날. 간 갈치 몇 마리를 사기 위해 어머니가 장터로 나가셨다. 장터에 볼일 보러 나간 아버지는 참외 가게에 앉아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지나가는 어머니를 아는 채를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어머니의 장터 나들이를 먼발치로 보았을 터인데 '혹시 들킬세라' 삿갓을 고쳐 써가며 끝내 모른 채 하더라는 것이다.

화가 난 어머니는 장터를 한바퀴 돌아 본 다음 간 갈치 대신 참외 한 아름을 사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작 아작 씹어 먹는 데모를 벌였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머니는 수시로 참외를 사와 아버지의 부아를 질렀다는데 아버지는 보고도 못 본 척 그렇게 버티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참외를 맛으로 먹지 않았다. 생전에도 참외를 잡수실 땐 한(恨)을 참외 속에 박아 그렇게 잡수시곤 했다. 어머니의 참외 애호 동기는 이렇게 단순하다.

나는 아버지를 뵈온 적이 없지만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차마 묻지를 못한다. “그날 장터에서 참외를 깎아 잡수실 때 정말 어머니를 못 보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 역지사지. 내가 혼자 참외를 먹다 들킨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을 때 아내가 내 앞에서 참외 한 소쿠리를 깎아 먹어도 나도 아버지처럼 눈만 껌뻑거리며 앉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재산 1호는 싱거 미싱이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 손재봉틀로 바느질품을 판적은 없었지만 식구들의 옷은 그것 하나로 해결했으니 우리 집에서 농사 다음으로 귀중한 것이었다. 싱거 미싱이 어머니의 손안으로 들어오게 된 내력도 정말 수필이다. 찰스 램이나 안톤 슈낙이 읽어도 무릎을 탁 칠 정도의 명편이다.

어느 여름날 저녁, 우물가에서 등멱을 치고 난 후 대청에 앉아 설렁 설렁 부채질을 하면서 아버지가 어머니께 물었다. "작은 마누라를 하나 얻어 저 아랫채에 살게 하면 어떻겠노" 장터에서의 참외 수모를 아작 아작 씹는 것으로 갚아주던 어머니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였다.

그날 아버지의 의중 시험에 무어라고 대답을 했는지 어머니가 바른 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모르긴 해도 아버지가 혼쭐나도록 당했던 것은 유추 짐작으로 알만하다. 어머니는 하늘에 미리내가 흐르는 여름 별밤에 모깃불을 피워둔 멍석 위에 누워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가 저지르려다 미수에 그친 '소실 입택 저지사건'은 쟌 다르크의 승전보에 질 봐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부린 행패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초선이라는 기생, 아버지의 소실로 짐작되는 입택 예정자를 같은 읍내에 살지 못하게 따돌린 그 솜씨랄까 수완은 이 나이에 지금 내가 생각해도 가뭇할 뿐이다.

어머니는 그런 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사람도 아니고, 나의 외삼촌인 당신의 남동생들을 데리고 가 퍼붓고 때리는 완력을 행사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일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비법을 물어 봤지만 어머니는 웃기만 할 뿐 가르쳐 주지 않고 산으로 떠나셨다. 나중 외삼촌에게 들은 "너거 아부지가 논 팔아 돈을 쥐어 줬으니까 떠났지, 그냥 갈 사람이가"란 이야기조차 진위 여부를 헤아리기 어려워 이 문제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아버지를 저승에서 만나면 한번 물어 볼 참이다. 그런데 만난 적이 별로 없으니 아비와 자식이 서로 만난다 해도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지 그 게 의문이다.

초선이가 떠난 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녀에게 사 준 싱거 미싱을 머리에 이고 두 번 쉬고 집으로 가져 오셨다. 칠 원 오십 전 짜리 영국제 손재봉틀은 아버지의 소실 초선이 덕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 재봉틀은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가난과 그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는 반려가 됐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물건이 되어 지금도 서재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의 바람과 풍류가 빚은 결실이다. 어쩌면 초선이는 우리 집 은인이다.

아버지를 뵈온 적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참외로 만나고 싱거 미싱을 통해서 만난다. 말 못하는 무생물이라고 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씀이 빛을 만들 듯 말씀은 온갖 사물을 만든다. 그리고 말씀은 그리운 이의 초상을 만들고 그 초상은 다시 말씀을 만든다. 여름철 땡 낮에 깎아먹는 참외 한 쪼가리를 통해 어머니를 만나고, 싱거 미싱 손잡이를 돌리며 아버지와 초선이를 만난다.

아버지와 아들인 내가 눈으로만 만나고 인식으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못 만난 게 아니다. 끈끈이 주걱풀 같은 끈끈하고 질긴 유전자는 먼 선조의 악행까지도 기억한다는데 왜 못 알아볼까. 외로움에 지쳐 하루가 온통 비어 있는 날이거나 절 집 마당 주위를 혼자 서성일 때 저승에 계신 아버지가 더러 전화를 걸어오신다. 오르막을 기어오르는 산행 중일 때는 간혹 문자 메시지도 보내 주신다.

"별일 없제." 대충 그런 내용이지만 이승과 저승은 거리가 너무 멀어 통화는 맑지 못하고 번번이 끊긴다. 문자 메시지는 "오빠, 외로워요"란 성인음란물과 함께 실려 올 때가 많아 '모두 삭제‘로 지워지기가 일쑤다. 아버지가 계시는 저승의 주소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실수다.

싱거 미싱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손재봉틀을 자유자재로 만지고 바느질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대학 일학년 때 요 호청을 뜯어 스키 파커식 등산복을 직접 재단하여 만들어 입고 지리산을 종주한 경험이 있다. 일주일을 장마 속을 헤매다 저자거리로 내려오니 등산복에는 곰팡이가 피어 냄새가 지독했다. 덕분에 만원 열차였지만 아주 넓은 자리를 확보하여 행복한 남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저승에 계시는 아버지의 덕이다. 초선이의 공이다. 그 보다는 초선이를 몰아내고 싱가 미싱을 집으로 이고 오신 어머니의 수가(守家)덕분이다. 세분 모두에게 경의와 존경을 드린다.

갑년을 넘기도록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다만 한 가지 미진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나 초선이를 제쳐두고 아버지와 이야기가 통할 그런 나이까지 당신이 살아 계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비참하게 이승을 뜨진 않았을 것이다. 단언하지만 정말 그랬을 것이다. 무정한 사람. 나는 아버지가 그립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버지는 가진 것 다 잃고 투전판에서 심장마비로 이승을 하직하셨다. 나와는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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