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봄비가 꽃잎을 적시던 밤, 가게 문을 닫을 무렵에 한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녀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더니 상기된 얼굴로 가게 안을 한 바퀴 들러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진열대에 놓인 나를 발견하더니 아까보다 조금 커진 눈동자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나 문 앞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을 드나드는 그녀는 어쩌다 한 번씩 나를 보며 씩 웃어주었다. 급히 뛰어나가다가 그녀의 몸이 나를 툭 스칠 때면 내 가슴에 훈훈한 봄바람이 일었다.

며칠 후 그녀 집으로 몇 개의 택배 상자가 배달되었다.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그녀가 몸에 딱 달라붙는 자전거 옷에다 헬멧을 쓰고 눈앞에 나타났다. 다정한 손길로 내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기도 하고 나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는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갔다. 강변 자전거 길에서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밤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사뭇 뜨거웠다. 그녀의 체온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차가운 내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바람에 움츠렸던 그녀의 어깨가 점점 펴지는가 싶더니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나중에는 땀까지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데이트 내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둘만의 밤 데이트가 이어졌다. 평소에는 밤에 외출을 잘 하지 않던 그녀가 나를 만날 때만큼은 으슥한 저녁을 고집했다. 숟가락을 놓고 저녁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그녀는 타이트한 옷차림으로 변신해 나에게 달려오곤 했다. 우리는 나란히 꽃잎이 흩날리는 봄밤을 함께 즐겼다. 하얀 꽃잎 조각이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바람에 흩어지는 풍경을 보는 일이 참 좋았다. 그녀는 가슴을 내밀고 달달한 밤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길 어디쯤에서 그녀의 눈이 유난히 빛나는지, 어느 지점에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발을 멈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똑 같은 길을 걷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같은 길도 볼 때마다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숙한 길을 가면서도 둘이 같이 있으면 늘 설레었다. 그녀는 나를 만난 후로 전보다 몸이 가벼워졌는지 먼 거리를 왕복해도 좀처럼 힘든 기색이 없었다. 둘만의 시간이 점점 쌓일수록 우리는 떼 놓을 수 없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불었다. 태풍 전야처럼 나뭇가지가 위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여름 햇볕 아래서 한껏 몸집이 부풀었던 초록 잎들도 어지럽게 흔들렸다. 날씨 탓인지 그녀의 낯빛도 다른 날보다 조금 어두워 보였다. 맞잡은 손도 다른 날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늘 하루는 밤 데이트를 건너뛰는 게 아닐까 짐작했지만 그녀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기어이 밖으로 나왔다.

축 늘어진 기분을 끌어올리려는지 그녀는 평소보다 음악의 볼륨을 키웠다. 한 박자 느리게 발을 움직이는 그녀를 안고 무겁게 오르막 턱을 건너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꼭 밀착해 있던 그녀의 몸이 일순간에 멀어지더니 길 위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다가와 괜찮으냐고 일으켰을 때 그녀의 턱에는 핏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를 뻔히 보고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에 몸서리를 쳤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넘어진 나를 남겨둔 채 그녀는 등을 보이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나를 만나러 왔다. 길에 널브러진 나를 한동안 쏘아보더니 우악스러운 손길로 일으켜 집까지 끌고 갔다. 현관에는 낯익은 그녀의 운동화가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혼자 우두커니 문 앞에 남겨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그녀를 걱정했다. 애타는 나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날이 밝은 후에야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턱에 두꺼운 반창고를 여러 겹 붙인 그 모습에 내 가슴이 다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와 남편이 나눈 한 마디가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계속 탈거야?”

“아니, 이참에 그만둘래. 어차피 더워지면 타기도 힘들어.”

그녀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나와 만나는 동안에도 그녀는 머릿속으로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날에 써 먹을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단 말인가.

하긴 모든 이별에는 핑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날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그녀는 나와 헤어질 핑계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작은 상처 하나쯤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택할 정도로 가벼운 사랑이었을까. 이까짓 일로 멀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만 내 가슴에 남은 사랑의 흉터는 세월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아직도 그녀와 헤어질 핑계를 찾지 못했기에.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 노을 / 최원현  (0) 2020.11.25
달의 귀환 / 김응숙  (0) 2020.11.25
거리에서 / 안재진  (0) 2020.11.24
수선화 / 이효석  (0) 2020.11.24
자기 서술법 / 박영란  (0) 2020.11.2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