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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저녁 노을 / 최원현

부흐고비 2020. 11. 25. 13:13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 노을은 참으로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놀라움이기도 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홍시 빛, 그래 분명 홍시 빛이었다. 헌데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번쩍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는데,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셨다. 그런데 갑자기 신내가 코를 찌른다. 제 색깔도 잃어버린 것 같은 물건,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정말 대단히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만한 큰 감을 딸 수가 없을 텐데 누군가 귀한 것이라며 갖다드렸던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큰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모양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하필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게 된 것을 마냥 안타까워하시다가 그걸 보여라도 줘야겠다며 다음 해 내가 내려갈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덕지덕지 묻은 채 역겨운 신 냄새를 풍기는, 먹을 수 없게 된 감, 그러나 손자에게 주고자 하셨던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와서인지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먹어봤던 어떤 감 맛보다도 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역겨운 신내까지도 할머니의 사랑 맛이 되어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처럼 전해져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할머니의 사랑으로 자라온 나, 나를 향한 그런 할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 것이며, 또 얼마나 클 것인가.

떠나오던 날, 할머니를 뒤로하고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저만치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져 분홍빛 진액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자 노을을 길게 깔아놓은 채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봤더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들릴 리도 없겠지만 목소리마저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을 되풀이하며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구 뛰었었다.

그런데 30년 전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이제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이시던 순리를 벌써부터 내가 받아들이고 있었음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저녁 노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삶,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따라온다.

가는 것, 그래 삶은 가는 거다. 그러나 어디로 얼마큼이나 더 갈 수 있을까. 그 날 보았던 할머니의 노을은 스무 해나 더 걸려 있었다. 내 노을은 또 얼마나 더 걸려 있을 것인가. 그래, 삶은 인생의 노을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일 게다. 해서 할머닌 어서 가라고 하셨나 보다.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더 서두르라는 것인가 보다.

아파트 단지 앞 나무 위에서 때늦은 매미 한 마리가 섧히섧히 울고 있다. 생의 노을은 저런 미물에게도 어김없이 오고 말 것 아닌가. 시간을 아끼라는 것, 할머니의 노을이 이미 내 노을이 되어 있는 지금,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내 생의 노을을 보고 있었음이 아닌가.


 

崔元賢 : 《한국수필》천료薦了 등단.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부회장. 강남문인협회 상임이사.《건강과 생명》편집위원. 제5회 [허균문학상]. 제1회 [서울문예상].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함.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 《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와 시집 《아름다울 수》가 있음.


통통동네 이야기 - 최원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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