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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의 귀환 / 김응숙

부흐고비 2020. 11. 25. 08:30

달이 확 다가왔다. 화면을 가득 채운 달의 표면은 여름 장마가 끝나고 바짝 말라버린 학교 운동장 같았다. 드디어 이글의 문이 열리고 닐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뒷모습이 보였다. 아나운서는 이제 곧 인간이 달에 첫 발자국을 찍을 순간이 다가왔다는 말을 흥분된 목소리로 거듭하고 있었다.

사다리를 반이나 내려왔을까.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더니 정지되어 버렸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눈이 빠져라 쳐다보던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안테나를 손보러 뛰쳐나가려는 순간, 다시 화면이 돌아왔다.

달의 표면에 첫 발을 디딘 암스트롱은 커다란 고무공처럼 퉁퉁 튀었다. 그는 '고요한 바다'라 불리는 마른 웅덩이에 깃발을 꽂은 뒤, "이것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지만, 인류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명대사를 읊었다. 1969년, 내가 11살 나던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민낯의 달은 너무나 메말라 보였다. 계수나무도 토끼도 절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말들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한여름 밤, 쏟아질듯 한 별들 사이에서 노랗게 빛나던 그 달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주선에서 보내왔다는 사진들에는 그저 마른 웅덩이가 움푹움푹 파인 피로한 표정의 달이 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달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은하수는 과연 흐르는 것일까 하는 따위의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이. 물론 산타클로스도 완전히 떠나갔고 인어공주, 피터 팬, 개구리 왕자들과도 멀어졌다. 나의 생각은 점점 불분명한 전체를 떠나 분명한 개체에 도달하기 위해 우주선처럼 계산된 속도로 치닫기 시작했고, 달은 서서히 잊혀졌다.

세상이 분명하게 보이는 동안만은 젊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단의 거리는 운동회 날 하얀 횟가루로 그어진 달리기 트랙만큼이나 분명했다. 학교에서는 일등이, 직장에서는 출세가, 사회에서는 성공이 그 끝에서 깃발처럼 나부꼈다. 우주선처럼 전력질주의 속도만이 구차하기만한 생활이라는 중력을 벗어나 그곳에 가 닿을 수 있을 터였다.

분명하게 드러난 최단거리를 쫓아가는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도 주위를 따라가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던 나의 속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시때때로 대오를 이탈하며 좌충우돌하였다. 마치 달처럼 메마른 가슴에 크고 작은 웅덩이가 파였다.

굳이 웅덩이에 이름을 붙인다면 '가난의 바다' 쯤이나 될까. 그 웅덩이는 너무나 넓어서 '학교 중퇴', '어머니의 병사', '동생의 해외 입양' 등의 작은 웅덩이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시대에 그것들은 드러낼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삶의 이면으로 감추어졌다.

깃발을 쟁취하지 못한 사람의 심리변화일까. 언제부터인가 분명하던 최단거리가 그 끝을 알 수 없게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깃발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대오에서 완전히 낙오한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 피곤한 일상에 찌든 내가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허연 낮달처럼 떴다가 지곤 했다.

아무리 낙오한 사람이라도 먹고사는 문제만은 해결해야 했다. 하루 종일 국밥을 만들어 팔았다. 저녁 손님이 끊어지고 가게를 정리하고 나면 밤 열 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삼거리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신호대 위에서 나를 기웃거리는 달을 보았다. 하얀 종이를 오려서 만든 것 같은 달은 마치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 걸려 있는 소품 같았다.

그 뒤로 매일 밤 달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물론 궤도를 따라 멀어지기도 했지만, 어느덧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메마르고 피로한 하루의 끝에서 만나는 달이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이다. 달이 점차 잘 익은 감자처럼 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한 것은.

큰마음을 먹고 여름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침 '블루문'이라 불리는 유난히 큰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성산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언덕에 올라서자 한 줄기 바람에 떠밀린 달이 바위 봉우리를 비껴 나와 선뜻 내게로 다가왔다.

한껏 부풀은 보름달이 검은 바다위로 금빛 가루를 흩뿌리며 내 눈앞에 둥실 떠 있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달을 마주 보았다. 마치 달 속에 커다란 백열전구라도 켜 놓은 듯 거뭇거뭇한 웅덩이들을 그대로 얼비치고 있었다.

문득 내 가슴 속의 크고 작은 웅덩이들에도 노란 불빛이 켜졌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 무늬들은 토끼도 아니고 계수나무도 아니고 절구도 아닌, 달이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입었던 상처가 아문 자국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가슴을 활짝 연 달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두 팔을 벌려 달을 힘껏 껴안았다.

마침내 달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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