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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밀당의 미학 / 노혜숙

부흐고비 2020. 12. 14. 09:19

선생은 매의 눈으로 교습생을 둘러보았다.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풀 죽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내가 바로 박자를 놓치는 바람에 잘 나가던 기타합주를 망친 범인이었던 것이다. 등 뒤로 사람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밀당' 즉 밀고 당기는 데에 서툴렀다. 특히 타이밍에 맞춰 밀고 당기고 멈추는 연구기법은 보통의 촉으로는 되지 않았다. 마음은 조급하고 손은 무능했다. 게다가 기본기도 부실했다. 진도에 급급하여 그 단계를 건성 훑고 지나친 것이다. 본격 연주에 들어가자 금세 바닥을 보였다. 걸핏하면 박자에서 이탈했고 허겁지겁 쫓아가느라 바빴다. 선생의 말대로 나는 결국 로망스까지 배우다 포기하는 보통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애당초 예상된 불화였다. 연하고 말랑한 살과 차갑고 날카로운 쇠줄의 만남이 어찌 순탄할 것인가. 민감한 손가락은 기타 줄의 금속성 질감에 질색했다. 줄은 요령 없이 잡아당기는 무식한 손길에 불협화음으로 응수했다. 독선적인 머리는 융통성 없이 연습을 강요했고 손은 우직하게 제 속도를 고집하는 바람에 가슴만 조바심을 쳤다. 줄은 정확히 감성의 현을 자극하지 않으면 결코 제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피부의 질감과 탈피를 거듭하며 손과 겨우 안면을 튼 사이가 되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사람의 관계도 그랬다. 관계의 묘미는 '밀당'에 있다는 듯 그 비결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소하게는 남녀 사이의 단순한 연애사에서부터 사업상의 거래에까지 ‘밀당’이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고난도의 '밀당'에 능통할수록 묘미는 극대화되고 경직된 관계는 근육을 풀고 말랑해졌다. 비례해 따라오는 이득도 컸다.

‘밀당'에도 복병이 있었다. 자존심이었다. 유일신 자본주의가 보기에 그것은 하수의 자제였다. 고수는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을 위해 기꺼이 '존심'을 조절하는 영악함이 있었다. 일보 후퇴가 가져다주는 손익계산에 빨랐던 것이다. 물론 하수에게도 깊은 뜻은 있었다. '황새가 붕새의 뜻을 어찌 알리' 그의 뜻은 물질과는 거리가 먼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한 푼의 이익에 '존심'을 팔기보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일이 우선적 가치였다. 굳이 '밀당'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 철시킬 의사가 없었다.

대게는 보통사람의 대열에 합류해 흘러간다. 소박한 안정과 행복이 한껏 그들의 목표였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밀당'의 요령은 타고나지도 습득할 배짱도 없었다. 가끔은 주제넘은 욕망이 키를 넘어 속이 들볶였으나 그뿐이었다. 처세의 영민함도 붕새의 큰 뜻도 없이 묻어가는 삶은 자주 우울했고 '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운명론의 바탕에는 체념과 비겁함이 깔려 있었다. 허울은 번드레했으나 내면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라디오 방송을 듣다 한 음악 전문가의 말이 귀에 꽂혔다. 그는 싱코페이션(당김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선율에 감칠맛과 흥미를 더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어 절묘한 타이밍의 조율과 강약 조절이 들어간 당김음 곡들을 들려주었다. '밀당'의 적절한 운용이 얼마나 리듬의 질감을 생동감 넘치고 풍요롭게 해주는지 실감했다.

결국 운용의 묘라는 걸 깨달았다. '밀당'이 쥐약이 되느냐 보약이 되느냐는 내가 대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였다. 물론 이를 위해선 대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유로운 정신의 개방성이 요구될 것이었다. 살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갈등의 근원도 알고 보면 내 안의 편협한 경직성이 아니었을까. '밀당'은 분명 조율의 한 방편이고 게임의 규칙만 지킨다면 충분히 미학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다 만 기타가 줄이 늘어진 채 방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밀당'의 기교에 익숙지 못했던 내 삶의 은유처럼. 나는 기타 줄을 조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한바탕 튕겼다. 그리고 이름을 붙였다. ‘밀당'의 전주곡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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