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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폐선 / 정호경

부흐고비 2020. 12. 30. 08:37

요즘의 항구 풍경은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항구에서 멀어져 가는 여객선을 향해 흔드는 애달픈 눈물의 손수건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에 화답하는 구슬픈 뱃고동 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이별을 흔드는 눈물의 손수건 대신 휴대폰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되어 떠나도 옆자리에 더 가까이 있게 만들어 주었고, 떠나고 보내는 사람들의 콧등을 저리게 만들던 뱃고동 소리는 소음 공해의 견제로 소리 없이 운송의 책무만 다하고 있을 뿐이다. 고도의 물질문명은 인간의 낭만과 그리움과 향수의 정감을 말끔히 앗아가 버렸다.

여수의 국동 일대의 선착장에는 수백 척의 크고 작은 어선들이 낮이나 밤이나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다. 잠수기조합 주변으로는 잠수부들의 잠수작업으로 잡아 올린 해삼이며 개불 그리고 전복이며 새꼬막 등을 실어 나르는 조그만 어선들의 입출항이 가끔씩 보이기는 하지만, 허기진 갈매기들만이 끼룩거리며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적막한 어항이 되어버렸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해질 무렵의 빨간 노을빛을 안고 줄줄이 입항하는 만선의 깃발은 바닷사람들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하여 어로 구역이 좁아진 탓도 있겠지만, 워낙 바닥까지 긁어버리는 저인망 어선들의 횡포로 인한 어자원 고갈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의 산책로는 집 뒤의 야산이기보다 비린내 풍기는 선창 쪽이다. 오전보다는 해가 기울 무렵의 저녁 어스름이 마음에 들어 혼자 뒷짐을 하고 자주 어슬렁거린다. 옛날의 그 풍성하고 활기찬 어부들의 웃음소리는 간 곳 없고 주변의 술집에서 들려오는 주정부리는 소리들뿐이다. 고기가 잡히질 않아 팔려고 내어 놓은 어선들이 수두룩한데도 사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잠수기조합 쪽에서부터 수협 공판장 앞까지의 선창에 즐비하게 매달려 있는 배들은 어림잡아 일천 척은 될 듯도 싶다. 크고 작은 어선들이 밀려오는 파도에 흔들리며 종일 졸고 있는 가운데 유독 눈에 뜨이는 어선들이 있다. 명성호 ․ 대성호 ․ 대안호 등 100톤이 넘는 철선들이다. 이들 폐선의 구조나 시설로 보아 옛날에는 어로의 대망을 품고 대양의 험한 파도를 헤치며 젊음의 꿈을 한껏 펼쳤을 법도 한데, 녹슨 선체의 갑판 위에는 때 묻은 이불 뭉치가 내팽개쳐져 있고, 낡은 밧줄이며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시커먼 기름통들의 황량한 풍경은 마치 지금의 늙어버린 내 몰골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허전하다. 누구에게나 꿈 많고 화려했던 젊음은 있었겠지만, 나의 경우 과식으로 인한 설사 몇 번 하고 나니 내 인생은 다 가고 말았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너무 내려 반갑잖은 손님이 되어버렸다. 어렸을 때 눈에 관련된 나의 기억은 강아지와 크리스마스카드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강설은 무엇인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설경이기보다 교통 두절과 인명 피해 그리고 생활의 불편뿐이다. 꼬마들과 함께 눈밭을 뛰어다니며 뒹굴던 강아지는 아파트 거실에서 종일 잠만 자고 있으니 강아지나 사람이나 이젠 정서가 메마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하늘이 들어 바람도 자서 바닷물은 눈이 간지러운 정도로 잔잔하고 푸르다. 오후 들어 포근한 봄볕을 찾아 산책을 나섰다. 돌산대교를 막 지난 섬 입구는 차도 확장 공사로 2년 넘게 지지부진 어지러운 상황이다. 빨리 가려야 갈 수도 없었지만, 내 딴에는 봄나들이 기분으로 속력을 줄여 공사 구간을 간신히 지나 반반한 4차선 길로 들어서자 내 옆을 휭 하고 지나던 영업용 택시가 앞을 탁 막아섰다. 나는 승객을 내려주기 위한 정차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조금 나가더니 다시 급정거를 했다. 웬일인가 하고 멈춰 서 있는 택시 옆으로 바짝 다가서면서 차창을 열며 사유를 물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언에 나는 기절할 뻔했다.

“늙은 놈이 뭣 하러 밖에 나와서 얼쩡거려?”

그 택시 운전사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지만 하도 무서운 세상이어서 나는 공손한 경어를 쓰며 응수했으나 그는 나에게 ‘해라’ 일변도의 폭언이었다. 내 뒤에 따라오면서 얼른 비켜주지 않는 꾸물거림에 신경질이 났다 하더라도 앞질러 와서 알게 된 늙은 운전자를 보았다면 그만 화가 풀려야 했을 것이며, 혹은 젊은 운전자가 앞에서 잠깐 꾸물거렸다손 치더라도 그런 무지막지한 지옥 같은 폭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앞뒤와 아래위가 완전히 뒤바뀐 어지럽고 험악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눈 앞에 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그 택시 운전사를 저주해야 할지 행운을 빌어 주어야 할지 머리가 멍하다.

나는 지금 돌산 무술목 몽돌해수욕장 바닷가에 넋을 잃고 서 있다. 송림을 울리고 지나가는 갯바람은 아직도 차다. 봄나들이하기에는 아직 이른가 보다. 산책 나온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체념과 울분이 뒤범벅이 되어 파도와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흰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청마(靑馬) 시인을 목마르게 부르고 있다.

“파도야, 나는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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