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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사진이 내게로 왔다 / 최민식

부흐고비 2020. 12. 30. 12:59

유진 스미스의 사진이 가슴에 오래 숨 쉬고 있음에 나는 놀랐다. 워너 비쇼프의 많은 사진들은 나를 숨가쁘게 했다. 그들의 사진들은 나를 캄캄한 우물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들의 사진은 가슴 터지도록 나를 휘감았다. 그들의 사진은 완벽했다. 지금도 그들의 사진들을 감상하면 가슴이 뛴다.

부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 가운데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 있다. 가난한자 없이는 부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혹은 신분의 기반으로서 또 일을 시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필요했다.

‘성공’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부’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을 얻는 것이다. 과거에 성공은 보통 상대적이고 경쟁적인 것으로써 남의 실패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협동적인 성공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성공할 때 행복을 느낄 필요가 있다. 결국 망해가는 사회에서 ‘성공’한들 또는 J.골드스미스가 말하듯 침몰해가는 타이타닉 호에서 포커 게임을 해서 이긴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내가 이웃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소유물을 쌓아둔다면 결과적으로 약탈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모두가 충분히 소유하기 전까지는 잉여란 것이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것을 훔친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의 일원이다.”라고 생각하며 내 주변의 사회적 몸에 대해 존경과 배려를 표현한다면 내가 정의하는 성공의 개념과 상충하게 된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고용되어 일하는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간소하고 결핍한 생활을 했다.“ 헨리 데이비스 소로의 이 말을 항상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어왔다. 다시 아늑한 슬픔이 타오른다. 보릿고개 시절의 무자비한 가난과 아픔을 찍어낸 나의 사진들 앞에 따뜻한 촛불이 일렁인다.

나는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을 찍는다. 볼품없이 일그러지고 불쌍한 자들, 생존의 무서운 슬픔을 느껴보라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는 곳에 사는 외로움을 바라는 외침을, 내가 전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결하여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다. 사진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허리를 굽혀 그들의 서러운 인생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우리 사회엔 봉사정신이 부족하다. 내가 1983년 독일정부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한 노인이 아프리카 어린이의 비참한 사진을 목에 걸고 모금을 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큰 부자였던 그는 총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였다. 물론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길거리에 모금 하러 나선 것이다.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나는 나눔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 사이에는 늘 연결고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 두 가지 힘을 합치면 세계의 불의와 빈곤에 강력히 대처할 수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나눔의 생활을 해야 한다. 뼈에 사무치는 가난이 널려있고 인도주의가 위기에 처한 세계에는 행동하는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50년을 오로지 가난한 서민들만 찍어왔다. 사진은 나를 찾아 주었다. 사진만이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여겼으며 사진에다 나를 송두리째 맡겨 버렸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불편할 정도로 들추어낸 비평자이며, 가난한 이웃들의 삶 속에서 진실한 모습을 포착해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나의 사진집 ‘인간’ 시리즈 14권은 스타이켄 편집의 <인간가족> 한국판이자 그 후의 이야기다. <인간가족>이 1950년까지 찍은 사진들이라면 나의 사진은 1957년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 사진인 셈이다.

사진의 사명은 인간과 인간을 결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인류의 역사적 운명을 우리들 자신이 각각 떠맡은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진은 여러 각도에서 논의될 수 있는 예술적 가치로 평가될 수 있으며,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사진은 진실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의 계시일 수 있다. 사진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의미가 전달되며, 그 반응은 개인의 삶이라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의 삶이라는 문제가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 자체를 아는 것은 그 사진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인간의 삶・감정・사고에 대한 태도의 과정을 사진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훌륭한 사진이란 그것을 바로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기록이 될 것이다.

사진가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그의 양심이며, 사진의 의의와 가치를 언제나 인간의 생활과 일상선상에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 가치의 기준은 개개의 인간 및 인간사회 속에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이상이며 사진가의 이념이며 높은 정신적인 힘이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가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사진예술이 잠자듯 평온하고 현란한 색체로 아름다운 풍광만 담는 것에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 소재와 조작된 기교만 가지고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고되, 인간의 진실을 나타내지 않을 때는 작품의 가치가 없다. 예술이라는 큰일을 하늘이 줄때는 고통을 준다고 하였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 한사람의 행복보다 가난한 이웃과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인간’을 영원한 주제로 삼아왔다. 어떻게 내 의무를 다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창작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고심하여왔다. 그러므로 나의 사진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무한한 행복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

사진의 창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진실의 표현이며 사진가의 정신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진은 잘못된 인식 위에서는 발전할 수 없으며, 위대한 사진 밑바닥에는 휴머니즘적 사상과 인간의 정신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각적 표현, 곧 경험적 표현이 중요한 것이며 오로지 직관만이 참다운 창작을 성립시킬 수 있다. 이런 표현의 사진이 바로 예술이며 인간사회의 리얼리즘이 될 것이다.

진실, 그것은 사진가 자신을 표현하려는 수단을 자기 경험에서 획득하는 것이다.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며, 자기 발견의 매개체이며 거대하고 강렬한 자기 반영이어야 한다. 사진가는 독자적인 예리함과 구체성으로 삶과 사진을 창조하는 리얼리즘적인 눈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진예술을 이해하고 향유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사진가의 생애가 그의 작품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가 우리의 관심이다. 사진가 개인의 체험만 표현하는 기록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삶의 모양과 깊이를 담는 것이다. 결국 사진가의 생애가 의미 있는 것은 생애 그 자체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애가 그의 작품 속에 참다운 의미로 되살아나 그의 작품과 함께 한 시대의 삶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평범한 사람이 채 갖지 못한 남다른 눈과 삶의 깊이를 헤아리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노력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치열한 현실파악에 있어서 사회적 주체성만이 위대한 승리라 하겠다.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사진가는 무수한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한 어머니의 산고에 비유할 수 있다.

리얼리즘 사진의 근본 목적은 새로운 사회 보다 나은 인간과 사회를 창조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사진가의 작품이 지니는 독창성은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다. 정열을 가지고 진정으로 주제를 파악하고 있다면, 사진가는 올바르게 그것을 지각할 것이며, 그 결과 진정한 독창적인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인식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崔敏植 | 사진작가,수필가 | 황해도 연안 출생(1928 ~ 2013)


대한민국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이자 수필가인 그는

1928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중앙미술학원을 졸업, 독학으로 사진을 익혀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서민들을 주로 작품에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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