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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빛 / 차하린

부흐고비 2020. 12. 30. 15:47

노을빛을 안고 뒷산에 올랐다. 하루 종일 마음이 답답한 탓도 있었지만 자투리 시간을 내어 걷기 위해서다.

저녁을 맞이하는 숲속에는 풀벌레소리와 바람소리가 잦아든다. 낮에 하늘을 날아오르던 까치들이 나무 가지 사이로 깃을 드리우는지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 따라 사방으로 흩어진 숲 향기가 다소곳이 내려앉으니 산속에 둥지를 튼 미물들이 밤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있나보다. 숲 향기를 맡으며 나는 산으로 들고 산은 저녁 어스름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노을빛이 가신 하늘에서 어둠이 내린다. 어둠을 밟으며 산길을 걷는다. 발자국 소리만 들려올 뿐 사방이 조용하다. 어둠만 존재하는 적막한 밤길이다. 길가의 소나무들이 검은 옷으로 무장하고 복병처럼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굽이를 돌아 또 굽이를 따라 도는 산길을 가다보니 슬금슬금 다가오는 어둠이 무서워졌다. 모퉁이를 돌면 더 까만 어둠이 숨어있을 것만 같다. 발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 순간 소나무 숲 속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낯선 불빛이다. 반짝이는 물체가 까만 소나무 숲 속을 날아다니며 포물선을 그린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눈길로 불빛을 따라 갔다.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한 마리가 숲속의 어둠을 밝히려는지 꽁무니에 노란 등불을 켜고 날고 있다. 솔향기가 묻어오는 잔잔한 바람결에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려올 듯이 분주한 모습이다. 오랜만에 보는 반딧불이라 무서움도 잊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꽁무니에서 초롱꽃 닮은 불빛을 내뿜는 반딧불이를 보니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여름밤이면 반딧불을 쉽게 보았다. 풀숲에서도 시냇가에서도 '나 잡아 봐라'는 듯이 꽁무니를 깜빡거리며 서너 마리씩 무리지어 밤하늘을 날아 다녔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별 같았다. 별처럼 빤짝이는 불빛이 신기해서 잡아보려고 따라다녔다. 결국 잡지 못한 나는 오빠들에게 잡아달라고 떼를 썼다. 오빠들이 잡아준 반딧불이 두 마리를 달아나지 않도록 종이 상자에 넣어두고 틈 사이로 불빛을 보았다. 밤하늘을 날아오를 때처럼 반짝거렸다.

낮에도 불빛을 내는지 궁금해서 머리맡에 두고 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상자를 열어보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빛도 사라졌다. 그때서야 내 호기심 때문에 반딧불이가 죽게 된 것을 알았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반딧불이는 밤하늘을 날아다녀야 하는 것을 몰랐다.

다른 소나무 숲에서 반딧불이 한 마리가 또 날아오른다. 등댓불처럼 깜빡거리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나 보다. 짝짓기 신호일까? 종류에 따라 짝짓기 신호가 다른 반딧불이는 완전변태를 한다. 애벌레서 여섯 번의 탈피를 거치고 번데기로 변했다가 성충이 되면 거의 보름을 산다. 그 동안 식음도 전폐한 체 짝짓기를 해야 이듬해 자신을 닮은 반딧불이가 숲 속을 날아다닐 수 있다.

암컷은 풀잎에 앉아서 수컷을 기다리고 수컷은 날아다니며 암컷을 찾는다. 그들은 종족 번식만이 이 땅에 태어난 사명감이라 생각하고 짧은 시간동안 본능에만 전념한다. 평균 칠십여 년을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한순간에 불과하다. 보름이라는 필명(畢命)의 시간이 그들에겐 필생(畢生)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반딧불이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후회 없는 삶을 남겨야한다. 암컷을 찾아 선회하는 수컷 반딧불이를 보면서 세상의 불빛을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많은 불빛이 있다.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과 그 빛을 받아 반사의 빛을 내는 지구와 달을 포함한 행성 위성과 수많은 별빛들. 머나먼 옛날에는 이런 불빛들이 지구를 지배했다. 반딧불이를 찾아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집집마다 방을 밝히는 호롱불과 어머니들이 밥을 짓던 아궁이 불빛이 있었지만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으로 형광등이 집안을 밝히고 가스와 전기로 밥을 지은 지 오래되었다. 거기다 길을 따라 보초처럼 서 있는 가로등과 현란한 네온사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들이 밤 세상에 난무한다. 밤길을 밝히는 유용한 불빛이 있는가하면 수컷 반딧불이처럼 세상 수컷들 발길을 붙잡는 유혹의 불빛도 있다.

요즘 불빛은 대부분 인위적이다. 가식이 보태져서 그런지 따스한 정감이 없다. 인공의 불빛보다 자연의 불빛이 마을을 덮고 있던 어릴 적 풍경이 그립다. 그믐밤에는 아스라이 먼 별빛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보름밤에는 산과 들에 부서지던 고고한 달빛이 옥양목처럼 하얗게 펼쳐졌다. 여름 밤하늘에는 아치형으로 길게 늘어선 은하수 양쪽에서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겨울 밤하늘에는 옹골차게 시린 바람 사이로 안드로메다은하와 수많은 이야기를 가진 별자리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밤을 새웠다. 밤하늘을 보면서 상상이 끝없이 이어졌고 내 꿈도 자랐다. 이제는 인공적인 불빛이 도리어 공해가 되었다. 도시와 마을을 벗어난 깊은 시골과 산속에서만 자연의 불빛을 볼 수 있다. 불빛뿐만 아니라 그 시절 순박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그립긴 마찬가지다.

반딧불이도 옛날이 그리운지 무공해 청정지역인 하천과 습지에서만 산다. 지금은 과다한 농약 사용과 생활하수로 하천이 대부분 오염되었다. 산업화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로 반딧불이의 서식처마저 파괴되어 먹이 사슬까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인간들 눈앞에 보이는 이기심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욕심 없이 살아가는 곤충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이건 곤충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지하수나 깊은 산 속의 약수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을 만큼 땅과 물이 본성을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 흔하게 보았던 반딧불이가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반딧불이도 정이 들지 않는 도심의 현란한 불빛을 피해 뒷산까지 밀려왔는지 모르겠다. 풀벌레도 메뚜기도 반딧불이도 우리와 더불어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살았던 시절, 그 시절이 그립다.

어둠을 잊은 도심에서 불빛들이 환하다. 빛을 등진 숲 속에는 어둠을 재촉하는 시간이 흐른다. 흐르는 시간이 빨리 짝을 찾아야하는 반딧불이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고 있는지 잠시 눈앞에서 사라졌던 반딧불이가 또 비행을 시작한다.

반딧불이는 소나무 숲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도심의 불빛을 향해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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