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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로등 / 박목월

부흐고비 2021. 1. 4. 09:21

가로등이 좋아지는 것은 역시 겨울철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 설레는 눈발 속에 우러러보는 등불,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닿을 수 있는 동경의 알맞은 위치에 외롭게 켜 있는 꿈의 등불이다. 그 등불이 켜진 가로등 기둥에 호젓이 기대서서 가없는 명상에 잠겨 보는 고독, 그것은 나의 젊은 날의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은 눈 오는 밤 가로등에 기대 보는 그런 고독한 낭만조차 잊은 지 오래다. 그것은 나의 연령의 탓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나이가 들수록 한결 고독한 것이며, 그래서 눈이 오는 밤은 한결 유감해 지는 것이리라. 다만 내가 고독한 낭만을 못 가지는 것은 세태의 탓일 것이다. 해방 후로 우리는 밤의 낭만을 잊은 것이다. 그 포근한 밤의 지향없는 소요를 통행금지라는 법이 막고 있는 것이다. 열한 시 사이렌이 불고나면, 이미 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청 앞길의 가로등은 다만 텅 빈 적적한 광장을 외롭게 비치는 고독한 등불이 되는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 넘어 거리에 선 가로등의 그 처참한 모습과 쓸쓸한 불빛, 그렇다. 우리의 생활에는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밤을 완전히 어둠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늙은 가로등’이라는 작품이 있다. 밤이면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마가 넓은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가로등은 그 꿈 많은 청년의 허연 이마에 그의 불빛의 쓸쓸한 키스와 또한 ‘쓸쓸한 축복’을 부어 주었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 젊은 청년의 이마에 비쳐주는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이 불빛이기보다 오히려 ‘신의 너그러운 축복’이요, ‘내 삶이 내게 비쳐주는 빛’ 같았다.

나는 나의 멀고 아득한 인생 여로의 대목마다 외로운 가로등이 켜 있기를 빌었다. 참으로 가로등을 멀리서 바라볼 때, 그것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은은히 비치는 별빛이다. 나는 가로등을 목표로 해서 어두운 길을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그 가로등 가까이 가면 한결 길이 환해지고, 때로는 내가 목표한 가로등에 벌레처럼 설레이는 함박눈이 이상하게 노래하는 꽃송이가 한 꼬투리처럼 걸리기도 하고, 또는 가는 실비가 비단 베일을 씌우며 신비롭게 속삭이기도 하고, 혹은 다만 어둠속에 등불만 쫑긋이 켜 있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그 목표한 가로등을 지나면, 우선 나의 그림자가 발에 밟힌다. 그 그림자가 밟히는 사실을 나는 무어라 표현할까? 눈물겨운 추억의 한 자락이 밟히는 것이라 할까? 나는 이 어둡고 고독한 밤길에 다만 가로등이 비쳐주는 다만 그만큼의 ‘빛의 둘레’속에 나의 그림자와 더불어 호젓이 길을 걷는 한갓 영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건너가는 나 자신 바로 그것의 모습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흐뭇한 고독감, 나의 삶의 가장 밑바닥을 흐르는 ‘서러움의 물길’이다. 이 물길 위에 배를 띄우듯 어줍잖은 몇 편의 시, 그것이 나의 숨쉬는 시의 세계일 것이다.

가로등의 이러한 빛의 둘레를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앞이 아득한 암흑의 벽을 다시 느끼며, 끝없이 아득한 어두운 길에 또 하나의 가로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가로등이 없을 경우, 아득한 어둠은 영원한 어둠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이다. 나의 일생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 가로등이 켜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지나온 길 위에 그것은 나란히 열을 지어서 스크린의 어느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뻗쳤다. 또한 나의 미래도 설사 아무리 절망하기로니, 늘 가로등이 대목마다 켜 있는 길일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신을 잃지 않는 한, 그래서 나는 때때로 창백한 이마에 가로등의 그 쓸쓸한 불빛의 키스와 축복을 받으며, 외롭게 흐뭇한 밤길을 갈 것이다. 가로등에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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