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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두 사나이의 선물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1. 5. 18:40

지난 토요일 오후 집들이하는 아우집에 친정 형제들이 모였다. 모처럼 만나는 기회여서 쌓인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틈에 청주에 사는 아우가 슬몃 내 손을 잡았다. “언니, 나 이거 선물 받았어”하며 블라우스 앞자락을 비집어 보였다.

아우의 가슴에는 하얀색 브래지어가 봉싯하게 솟아 있는데 아우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순간 (아휴, 똑같아 똑같아)를 속으로 외치며 먼 세월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썼었다.

고학년 어린이들과 전 직원이 참여해서 편지와 위문품을 보냈는데 고맙다는 답장이 속속 날아들었다. 특히 여교사들에게는 더 많은 답장이 왔고 애틋한 사연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 p교사는 남자인데도 편지의 회수가 잦아 우리는 무언중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교정에 플라타너스가 윤기 찰찰 넘치는 어느 오후, 교무실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p교사의 책상 위에는 월남에서 보내온 소포가 놓여 있었고 모두가 호기심 차서 둘러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장난기로 만져 보고 두드려 보고 냄새를 맡아보며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짝짝 끌신을 신고 드디어 p교사가 나타났다. 그는 분명 남자인데 손놀림이나 걸음걸이며 말씨가 여자 못지 않게 나긋하고 정스러웠다.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물꾸러미를 푸는 p교사의 손길이 조금 떨리는 듯싶었다. 수줍음 타는 성품 탓이다. 한 겹 두 겹 벗겨지고 마지막 포장지는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색지라고 기억된다. 약간의 긴장감이 모두의 말을 삼켜버렸다.

이윽고 마지막 포장이 풀린 순간 p교사는 어머머를 연발하며 주저앉았고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여성 전용의 브래지어.

요염기까지 내뿜는 까만 브래지어는 남교사들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예기치 않던 선물이 예기치 못한 p교사에게 날아온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생사의 치열한 싸움터에서 그 병사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물을 꾸렸는지 짐작이 간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던가, 고국에 돌아올 내일을 믿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인 p교사가 어떤 사연을 썼기에 그런 기발한 선물을 받게 되었는지는 두고두고 우리들의 의문이었다.

브래지어를 선물 받은 사나이가 선물을 보낸 사나이에게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 계속 탐색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 해 가을 휴가를 얻어 귀국한 군인이 학교로 찾아와서 아주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나는 아우의 브래지어를 제부의 선물인 줄 알았다. 더욱이 제부에게 후한 점수를 메긴 것은 유방암으로 절제 수술한 아내에게 남편이 준 선물이라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아우에게는 단 한 점 혈육이 있는데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다. 그 조카가 제 어미 생일날 아주 쓸쓸한 얼굴로 내민 선물이란다. 아이는 그토록 좋아하던 유방에 남다른 기억과 애정을 담았으리라.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잠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던 유년의 추억은 아이의 일생을 두고 시린 마음을 녹여줄 화롯불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 팔순이 넘으신 시어머니의 등에 파스를 붙여 드릴 때면 남편은 어머니의 젖무덤을 쓸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유순한 빛을 보게 되고 개구쟁이의 천진스런 웃음을 본다. 간지럼 타는 어머니의 주름 깊은 얼굴에는 마지막 밝힌 모정의 불빛이 환하고, 나는 이런 두 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사진 찍듯 바라본다.

어린 조카가 용돈을 모아 어미의 브래지어를 산 뜻은 유방의 상실보다 재발하지 않고 오래오래 제 곁에 남아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우의 분홍빛 미소를 생각하며 저려오는 내 가슴에도 간절한 염원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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