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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무 가슴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1. 6. 09:28

한 뼘 남짓한 나무토막을 바라본다. 어느 냇둑에서 한 세월 보내다가 고요히 임종한 은사시나무, 그 숨결 더듬으며 눈을 맞춘다.

목각을 처음 시작한 날, 나무토막 앞에서 나도 나무토막이 되었다. 표정 없는 나무에서 무엇을 캐내야 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하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칼이라고는 연필 깎는 칼을 써 본 것과 도마에 무나 파를 썰던 경험뿐, 예리한 칼끝에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색을 알아차린 선생님이 칠판에 글을 써나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끈질기게 일생 동안 취미로 할 사람만 시작하자. 나무와 대화하며 성질을 알자.

나무토막을 세워본다. 안정감 있게 서 있어야 평생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 이 나무토막에서 사람의 얼굴이 태어날 것이다. 앞뒤 어느 쪽이 얼굴이 될까 점쳐두고 얼굴 쪽의 수피에 일자 칼을 대고 망치로 두드렸다. 나무에도 비늘이 있어 그토록 싱싱했을까, 고동색의 비늘이 벗겨지며 뽀얀 살이 드러났다. 나무의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석양 비낀 하늘에 노란 손수건처럼 펄럭이던 용서의 기별이 전해오는 것 같다.

은밀히 간직한 동정의 속살을 범해 얼굴의 윤곽선을 그었다. 선 밖의 여백에 둥근 칼을 대고 때리고 파고 깎이며 형태가 나타나는데 잠시의 방심도 잡담도 허락하지 않는다. 틈을 주면 칼이 빗나가서 손을 다쳤다. 빨리하려고 서두르거나 마음이 소요스러우면 망치질도 엉뚱한 곳을 때려 멍이 든다. 칼끝에 정성을 모으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망치질을 해야 하고, 나무토막에 새로이 형태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이 풀리지 않았다. 나무토막 속에 무슨 형상이 들어 있다는 게 말이 되기나 하는 것인지, 조금씩 작업을 해가며 마음으로 보고 붙이는 것이 아니라 털어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음에는 눈, 코, 입, 귀를 그려 놓고 파 들어가는데 장님이 밤길 나선 기분이었다. 큰 칼은 두고 작은 칼로 오밀조밀 파야 한다. 코가 우뚝 서자면 옆을 파주어야 하고, 지그시 감은 눈을 만들려면 눈두덩을 둥두렇게 굴려주고 눈썹달 같은 선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아는 것과 파는 것은 별개였다. 입술 선에 힘을 조금 넣었더니 화난 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기를 일 년여가 된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것이라 작품은 석 점뿐이지만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 특별한 기쁨이 솟는다. 다섯 사람이 만든 얼굴이 각각 다르고, 어딘가 만든 이의 얼굴 모습과 비슷하게 되는 것도 이상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이 가서 마주하고 있으면 은연중에 대화 같은 교류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누가 작품 속에 자기의 혼을 불어넣는다 했다. 그것은 내밀한 일치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수천 번의 칼자국을 입어야 하고, 수천 번의 망치질을 맞아야 한다. 아프다고 망치질을 사양하면 그것은 땔감으로밖에 쓰지 못할 나무토막이지만, 찢기고 터지고 피 흘리며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으로서의 환생, 작은 것은 작게 큰 것은 크게 절망해야 하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선생님께 미안하다. 나이배기 제자는 제일 굼떠 진척이 없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그럴 듯하게 만들어 주면 내 것 같지가 않아서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버려진 자식 같다고 떼를 쓴다. 자기하고 싸움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금언이다.

이번에 하는 작품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는 부처님의 형상이다. 귀한 후박나무를 구해서 작업하기가 좋다. 어깨선이 둥글게 퍼져 양팔로 흘러내리고 두 손은 자연스럽게 마주 잡았다. 목이 잘록해 답답하게 느껴진다. 한량없이 들여다보다가 집으로 가지고 왔다. 저녁을 먹고 또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식구들이 한 마디씩 보탠다.

부처님 모습은 찍어도 안 붙이고 전 어느 대통령을 닮았다고 한다. 이런 낭패가 있나. 부처님은 어디로 가고 엉뚱한 얼굴이 나왔는가. 나는 조각칼을 놓고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엿새가 지난 다음 다시 얼굴 앞에 앉았다. 어렴풋이 짚이는 생각이 있다. 부처님을 만나려면 내 마음 안에 부처님을 모셔야 하는데 세상 온갖 잡동사니로 틈이 없으니 생뚱한 얼굴이 나올밖에…….

선생님은 목을 키우기 위해서 머리를 깎아냈다. 한결 시원해졌다. 작은 조각칼로 이목구비를 다듬은 후 사포로 문질렀다. 문지르는 일도 쉽지가 않다. 특히 윤곽을 내는 선의 경우 자칫하면 인상이 바뀐다. 사포로 다듬고 보니 후박나무의 나뭇결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 또 다른 분위기를 준다. 나무마다 본성이 있어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첫째로 배운 점이다. 소나무는 나무가 단단한데 은사시나무는 살이 무르다. 조금만 망치질이 세어도 턱없이 파인다. 어떤 것은 내리 깎아야 하고 어떤 것은 치깎아야 잘 나간다.

치목장에서 일하는 목수들은 나무의 친구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곳에서는 베어진 나무도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습관대로 생명을 지키고 있어 단순한 재목이 아닌 생명으로 다룬다 한다. 그래서 켠 나무들도 그냥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살았을 때 그 나무가 살았던 방향으로 뉘어 놓는다. 집을 지을 때도 기둥을 세우려면 서 있던 모습으로 세워야지 거꾸로 하면 뒤틀어 집을 기울어뜨린다는 이야기다.

나는 목수는 아니지만 가끔 나무토막을 끌어안고 그 가슴에 얼굴을 대볼 때가 있다. 청청한 나무로 서 있을 때의 싱그러움을 만나고 싶어서, 기다란 팔을 펴서 온갖 새들 쉬게 한 넉넉한 품을 만나고 싶어서,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비밀을 굳게 지켜 줄 것도 같아서다.

나무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나도 누구에겐가 나무 같은 친구였으면 참말 좋겠다. 우리 이웃에 나무를 키우는 남자가 있는데, 자작나무를 심을 때는 한 그루만 심어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너더댓 그루를 한데 어울리게 해서 심어주면 서로 이야기를 해가며 공동체를 이루고 자라난다니, 내가 좋은 친구를 갖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먼젓번 얼굴을 할 때 제일 마지막에 촛불을 켜놓고 그을음에 그슬렸다. 단단하게 하려는 것이라 했다. 나무토막 팔자가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두드려 맞고 수없이 파여서 이제는 화형에 이르니 이름 없는 나무토막으로 발에 차이는 일이 낫지 않겠느냐 물어도 보았다. 그러나 나무토막은 입을 앙다물고 마치 순교자처럼 피를 흘리고 나더니 잿빛 예수님으로 부활하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라는 나무토막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나무토막으로 무엇을 만드시려고 60여 년간 두드려 패시는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들 앞에서 오늘도 물어 보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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