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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장날 고추 모 세 판을 사다 심었다. 오이고추, 청양고추, 일반 고추다. 모종을 파는 상인의 생존율 100%라는 부연설명까지 들어서 그런지 땅내도 못 맡은 모종들이 싱싱하기가 청춘이다. 모종을 심고 나면 한 보름 동안은 빈약한 떡잎가지 시들배들한다. 겨우 어른 손 길이만한 어린 것들이 적어도 보름 정도는 죽느냐 사느냐 사투를 벌일 것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땅내를 맡은 뿌리들이 몸살을 끝내고 착지를 한다. 대궁이 탄탄해지고 잎들은 제법 작은 바람에도 너울거린다.

이때쯤이면 줄기에서 영어 알파벳 Y자 모양의 가지가 나온다. 농군들은 여기를 방아다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에 쓰던 디딜방아를 틀어놓은 모양이다. 아직 어린 대궁인데 어쩌려고 가지부터 버는지 속내는 모르나 저도 꿍꿍이속이 있을 터이니 지켜볼 따름이다. 하루가 다르게 잎이 푸르러가고 제일 위순에서는 벌레알 같은 꽃망울이 박힌다.

사과농사만 30여 년 지은 탓에 고추 몇 포기 심어놓고 이웃 밭에 사람만 보이면 묻는 게 일이다. 지주목은 언제 세우냐, 비료는 언제 주고 소독도 해야 하느냐, 귀동냥으로 키우는 고추 모는 주인 허물은 탓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다. 생명의 본질일지 모르나 아직 다 크지도 않은 고춧대, 방아다리에 중뿔나게 곁가지가 붙는 것이다. 이 곁가지를 방아다리순이라 하는데 모조리 따주어야 하는 것이다. 눈치도 없이 커버려 원가지 성장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고추농사 첫해에는 이 곁가지를 쳐주지 않아서 고추나무가 키는 크지 않고 상체만 무성했다. 덕분에 고추수확은 어설펐다. 다음해에는 맘먹고 쳐준다는 게 고추묘 목 턱까지 쳐버려서 이웃들의 실소를 샀다. 너무 안쳐도 너무 많이 쳐도 고추나무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다.

올해는 그동안의 실수를 교훈삼아 제대로 농사를 지어볼 요량이다. 농사래야, 김장고추가 될 리 없고 오며가며 반찬으로 따다먹는 게 고작이나 심는 것만으로도 안되는 게 농사니 정성껏 길러볼 것이다.

그동안 예총에서 하는 품바축제가 있어 보름쯤 농장에 오지 못했다. 읍내에서 보름은 여일한데 농장의 보름은 무게가 다르다. 아니 성취가 다르다. 방아다리에 첫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이다. 연두빛 고추가 땅을 내려다보고 다소곳이 달려 있거나 어떤 것은 성난 것처럼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벌써 약이 올라서 짙푸른 고추도 있고 저마다 한 개씩 자랑스럽게 들고 서서 고추나무는 흠흠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마침 그날 읍내서 손님이 왔다. 농장에 무엇을 심었나 궁금해서 왔다는 후배는 화초처럼 기르는 우리집 고추밭을 기웃거리다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날린다. "선배님, 이 고추는 두고 보는 고추가 아닙네다. 요렇게 뚝 따서 먹으라는 것입지요." 하면서 방아다리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탈이 난다고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며 공연히 혼자서 비실비실 웃었다. 그리고는 올해는 음성 미스터고추 심사하러 안 가시냐고?

후배가 떠나고 어떤 기억이 스쳐갔다. 그러니까 내가 낙향한 몇 년 후 이곳 축제에서 예총회장이라고 '고추심사'를 의뢰해 온 일이 있었다. 음성이 고추의 고장이니, 고추심사라면 고추농가에서 나온 고추의 우열을 심사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 일이라면 농촌지도소 소장이나 진짜 농사꾼이 제격이지 고추의 고자도 안 잡아본 생무지에게 얼토당토않은 주문 아닌가. 당연히 고사했다.

그런데 다음해에 또 심사의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공문까지 보냈다. 고추심사가 아니라 음성 미스터고추심사라는 것이다. 내심 내키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때 보니 수영복 차림의 아가씨들이 무대를 빙빙 돌며 몸매를 자랑하는 것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는데도 그런데 하물며 무대 코앞에서 여체가 아닌 반라의 남체를 육안으로 보고 심사를 한다는 게 자신이 없었다. 발레리나의 타이즈 위로 두드러지는 몸매에도 눈길을 돌리는 판인데… 한편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건만.

며칠을 고민하다가 사무실에 출근하여 주최 측에 고사의 뜻을 밝혔다. 그쪽에서는 곤란하다며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니 그냥 나와서 앉아만 있으라는 요청이다. 어렵게 전화가 이어지자 우리 여직원이 나섰다. "회장님, 음성 미스터 고추는요, 개량한복 입혀 심사하는 거예요." 아뿔사. 여직원의 목소리가 컸던지 주최 측 총무의 너털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안심하고 오시라 해요" 라는 말이 들렸다. 그 사건이 소문이 된 것이다. 숙맥이 따로 없다. 후배는 숙맥 선배네 고추밭에 와서 방아다리 고추는 고추들이 먹어야한다면서 따가고.

그런데 진짜 농사꾼은 이 방아다리 고추는 달리는 족족 따버린다고 한다. 이놈이 한가운데 달려서 크기 시작하면 다른 고추들의 생장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고. 후배가 따가고 남은 고추를 따면서 바람 같은 최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음성이 고추 명산지가 된 것은 이곳 땅이 양기보다 음기가 세어서 그렇대나. 어쨌거나 음성 '햇사레고추'는 명품이다.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하고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대놓고 찾아보니 가을이면 고추 사러 오는 대절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선다. 고추는 매워야 진가가 있다. 맵고 달고 오죽하면 뉴욕에 사는 후배는 작아도 매운 조선고추가 그립다고 하지 않던가.

방아다리 고추를 딸 때쯤이면 봄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름이 승승장구 기승을 시작할 때다. 바람 빛깔이 푸르다. 모든 생명은 바람을 먹으면서 생장한다. 더위를 머금은 바람은 가끔은 빗줄기도 품고 달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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