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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타작 마당에서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1. 7. 08:49

노적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들판에 간밤에 서리가 내렸나 보다. 이제 마악 동산을 기어 오른 햇살이 퍼져 풀잎에 엉긴 서릿발이 반짝인다. 뜨끈뜨끈한 국수동이를 이고 미역바우 언덕에 올라서니 왕왕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흥겹게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집 타작하는 날이다. 지실떠는 아기의 재롱이 더 귀엽듯이 지난 여름 유난스러웠던 가뭄을 치르고 태풍을 견디고 얻은 결실이라 그런지 바라보는 감회가 더욱 깊다. 10여 명의 일꾼들은 8마력 경운기를 둘러싸고 맡은 일에 여념이 없다.

볏단을 끌어내리는 사람, 끌러주는 사람, 기계에 볏단을 물리는 사람, 포대를 들고 알곡을 받아내는 사람, 검불 더미를 갈퀴질로 걷어내는 사람, 털린 볏짚을 묶는 사람, 빵빵하게 채워진 마대를 묶는 사람, 한편에서는 고래실 논에서 경운기 한대로 미처 쌓지 못한 볏단을 실어 나르는 네댓 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한 몸뚱이의 지체처럼 맡은 일을 척척 해나가는 것을 보며 협동하는 마음이 모든 건설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또한 벼를 벤 현당에서 탈곡을 하니 탈립의 손실도 한결 줄어지고 볏짚이나 됫목 처리도 손쉬워 좋다.

새벽밥을 먹고 나온 터라 썰렁한 냉기에 입술이 포르스름하다. “얼릉 덜 새참 목 햐 -.” “가만 좀 있으란 게 그러네, 요놈마저 채고 먹잔 말여.” 볏짚을 묶던 용이 아버지 말을 좔좔좔 쏟아지는 벼를 마대에 받아내던 기벽이 아버지가 받았다. 성질 급한 순동이 아버지는 한 손에 볏단을 든 채 막걸리를 들이킨다. “꿀꺽꿀꺽 크이-, 앗다 술맛 좋다 목이 셔언하구먼.” 입술에 묻은 술 방울을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고 나서 멸치조림 한 저범을 털어 넣는다.

저만치 벼 푸대가 열 다섯개 보기 좋게 쌓여 있다. “ 기형엄마, 올해 농사 자알 지었으니 씨암탉 잡아 오슈.” “암만유, 잡아오고 말구유.” 나는 노랗게 쏟아지는 황금알을 손바닥에 받아 퉁퉁 영근 벼알을 깨물어본다. 딱 소리가 난다. 이만하면 추곡수매에 1등은 받아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쓸쓸해진다. 해마다 추곡 수매가에 온 기대를 걸어보지만 흡족할 만한 인상은 없었다. 올해는 고추 값도 과일 값도 제자리걸음 아닌가.

구수하고 부드레한 손국수를 한 대접씩 훌훌 마시고 난 일꾼들은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세수 못한 얼굴에 말라붙은 눈곱을 비빈다. 나는 일손을 놓고 오래 이들을 살펴본다. 아무리 뜯어보아야 순해 빠진 흙의 자손들, 씨 뿌린 만큼만 바라고 사는 욕심 없어 모질지 못한 목숨들, 고향을 떠나며 죽는 줄만 아는 순박하고 요령 없는 군살 박힌 손들, 내 인생은 여기서 시작해서 여기서 끝나 가니 몸은 부서져 흙이 되더라도 자손은 대처에 보내 출세 시켜보련다고 앙 다무는 한(恨)의 부정(父情)들. 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름 없이 살다가는 우리들의 땀방울이 모여 농촌 근대화는 착실하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순덕 아버지가 개울 건너편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권서방, 권서방, 얼렁 와서 한잔 비워” 그쪽으로 모두들 눈길을 돌린다. 건너편에 한군데 뻘겋게 타죽어 말라버린 벼 포기가 그래도 있다. 한참 있다가 건너온 권 씨는 여럿이 권하는 막걸리 대접을 받아 들고 한숨을 푸욱 내쉰다. “소독을 워터키 했길래 벼가 그 모양샌가, 쯧쯧.” 모두들 혀끝을 끌끌차며 권씨를 바라보자 권 씨는 푸념처럼 말을 이었다.

지난여름 벼가 꼿꼿이 패어 날 즈음 소독약을 타서 병충해 방제를 했다. 8백 평 중 삼분의 이쯤 소독약을 치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약물 받은 벼가 시들시들 늘어져 갔다. 이상하다 싶어 경운기 발동을 끄고 약병을 보니 전착제가 아니고 제초제였다. 눈이 뒤집히는 것 같더라고. “ 앗다. 우리가 언제부터 소독약 뿌리고 농사 졌다? 풀약이면 풀약이지 제초제는 무슨 제초제여?” 권 씨는 깍두기를 으적으적 씹어댄다. “그건 그려, 소독약 이름이 하두 많고 말짱 꼬부랑 말이어서 우리 같은 맹무식쟁이는 여간 힘든게 아녀” 이름 석자 간신히 쓰는 과수원 집 인욱이 할아버지 말이다.

꾸밈 없는 이들의 애환을 들으며 새참 그릇을 챙기다 건너편 논을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것은 군데군데 약물이 그냥 지나간 곳에 성기게 익은 벼 이삭이다. 흉터에 새살이 돋듯이 그렇게 돋아난 노오란 이삭, 권 씨도 저 이삭처럼 상처를 아물리고 내년 다시 시작하기를 빌어본다.

들판은 싸늘하게 비어가고 있다. 이렇게 가을 들판에 서면 나는 겸손의 향기에 매료된다. 누군가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는 상실의 순절(殉節). 인자로운 대지에 입 맞추고 싶다. 여기저기 세워 놓은 허수아비만, 할 일 끝난 머슴처럼 한가롭게 서 있을 뿐 갈대가 손을 흔든다. 허연 수염을 날리며 떠나가는 가을을 전송하듯.

저 만치서 경운기가 탈탈거린다. 보리 씨를 파종하는 집인가 보다. 든든하다. 가을에 타작 끝낸 논에 보리를 뿌려 전 국민의 5분의 1씩만 혼식을 해도 쌀을 수입하는 외화는 절약이 될 터인데, 애국하는 길은 결코 먼데 있지 않는 것, 우리도 어서 서둘러 보리 씨를 넣어야지.

점심을 꼬작히 지어 들판으로 나서자 행렬이 한 소대는 될법하다. 동네 꼬마들도 이웃집 검둥개까지 줄레줄레 따라나서는 흥겨운 논둑길. 얼큼하게 볶아온 닭고기를 뜯으며 일꾼들은 물론이요 이웃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우체부, 나그네도 스스럼없이 마주 앉는 축제의 자리다. 서먹서먹한 사람들도 식사를 나누고 나면 한결 이므럽다. 그리고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허기를 채우기 보다 정(情)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의 온기는 식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타작마당은 농가의 크라이막스, 이런 날이 있어 농촌을 사랑하고 밀착되어 사는 우리들이다. 벼 포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 뒤를 따라 걸어오며 푸근한 나는 생각에 잠긴다. 내 인생의 가을에 나는 무엇을 수확할 것인가를.

결코 게으른 자의 가을처럼 허망하지 않기를 비록 풍요의 결실은 못 된다 해도 빈손의 가을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앞산을 바라보니 산은 빨간 단풍으로 치장을 하고 화득화득 승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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