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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우계묵 / 김석류

부흐고비 2021. 1. 7. 12:41

오랜만에 시어머님을 뵈러갔다.

“경동시장에서 닭발이 한 보따리에 5천원이라는데 사다 줄 사람이 없네?”

시아주버님이 아픈 아내를 간호하다 다친 허리를 우계묵을 먹고 효험을 본 일이 있었다. 어머니도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우리가 찾아갔다. 나는 경동시장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며느리로서 재료만 덥석 드리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잘 달여서 가져오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그래, 얼마나 더 사실까?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자.”

인터넷으로 래시피를 검색했다. 핏물 섞인 닭발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소름이 돋고 속이 매스꺼웠다. 나는 원래 비위가 아주 약하다. 집에서 사골이나 돼지고기 등을 요리할 때 특유의 냄새로 곤욕을 치른다. 어머님을 위해 시도해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설명서를 읽어 내려 갈수록 더럭 겁이 났다. 걱정이 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사진 속의 닭발들이 나를 향해 행진하여 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영화 ‘환타지아’에서 괴테의 발라드를 뒤카스가 표제음악으로 만든 ‘마법사의 제자’ 같았다. 마법에 걸린 빗자루 때문에 우물물이 넘쳐흘렀다. 미키마우스는 빗자루를 도끼로 쳐서 멈추게 했다. 잠시 후 수백 개의 빗자루로 변해서 물동이를 들고 일어 선 모습이 꼭 닮았다. 스펙터클한 배경음악 속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으스스했다. 괜스레 해 드린다고 말을 꺼냈나? 속마음과 다르게 착한 척 한 건가?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 갈등하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남편과 함께 경동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지원군이 필요했다. 주재료인 닭발 3kg과 우슬초 그리고 소주와 생강, 파 등 부재료를 장만했다. 나는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를 할 여력이 없었다. 마비된 오른쪽 다리는 꼬집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마치 신경이 끊긴 차가운 의족 같았다. 추운 날씨에 증세가 더 심해졌다. 선배교사가 염소를 중탕해서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당시는 건강원이라는 곳이 없고 주문해서 손수 만들어야만 했다. 아저씨가 토막을 낸 염소를 포대자루에 담아서 어깨에 메고 왔다. 금방 잡은 것인지 따끈따끈했다. 수업시간에 한쪽 구석에 있는 포대자루에 눈길이 갔다. 최근 방송에서 본 ‘토막 살인사건’이 자꾸만 연상됐다. 이럴 때 친정어머니가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엌에서 심호흡을 하고 용감하게 염소를 자루에서 꺼냈다. 잘 씻어서 한약재와 함께 찜통에 넣었다. 한참을 끓인 후 뚜껑을 열어 보았다. 뽀얀 수증기 속에서 염소머리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깜짝 놀라 얼른 뚜껑을 ‘꽝’ 닫았다. 나는 ‘이걸 마시면 나을 수 있다’고 속으로 외치며 코를 막고 겨우 마셨다. 이런 끔찍한 일은 두 번 다시 해 낼 자신이 없었다.

장바구니 밑바닥에 있는 닭발봉지를 도저히 꺼낼 용기가 없었다. 남편이 팔을 걷고 씻어서 핏물을 뺐다. 끓는 물에 한번 데치고 다시 씻어서 찜통에 준비한 재료와 함께 넣었다. 팔팔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 8시간을 은근히 졸여내야 완성된다. 오늘 밤은 꼬박 날을 새야 하지만 감수(甘受)하기로 했다. 물이 너무 졸아들까 염려하며 가스 불 옆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97세인 시어머니는 30대 초반에 홀로 되어서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허리도 꼿꼿하고 외유내강이신 성품에 건강관리도 잘 하였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가 있으랴, 문 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다. 남편은 평생 고생한 어머니의 건강식을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

결혼한 딸이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왔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호들갑이다. 할머니가 드실 것 이라고 자초지종을 전하였다. 딸은 “엄마, 저는 못한다고 했을 거예요.” 신세대답게 단숨에 잘라 말한다. 우리 때는 시어른에게 못한다는 말은 불법이었고 말대답으로 간주(看做)하였다. 학교에서 비상근무 중이라 조퇴를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얘, 네 시아버지 기일 알지? 제사지낼 사람 없으니 그리 알아라.”

상황을 알지 못한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면 너무나 속상했다. 직장맘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공자의 말처럼 나도 이순(耳順)을 넘으니 마음이 원만해지고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이젠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다가 곱게 돌아가시길 기도한다. 우계묵을 들고 어머니 댁으로 향하는 남편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어머니의 흐뭇한 미소가 그려진다.

* 우계묵 : 우슬과 닭발을 삶아서 묵으로 만듬. 관절에 효과가 뛰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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