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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눈물 찔끔, 콧물 탱 / 조문자

부흐고비 2021. 1. 8. 13:51

삭정 개비에 탁, 성냥을 켠다. 그을음이 꼬리를 흔들며 불꽃이 일어난다. 불이 붙었는가 하면 꺼지고 꺼졌는가 하면 다시 붙는다. 일단 불이 붙으면 여왕 옹위하듯 해야 한다. 우격다짐하면 토라져 버리니 조심스럽다.

붉은 혓바닥을 길게 뺀 불꽃이 다짜고짜 나무를 휘어 감고 요망을 떤다. 나무는 양반 무게를 잡고 만삭의 몸처럼 잔뜩 팽창해 있다. 길고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으며 떡 주무르듯 몸을 주물럭대니 그만 얼이 뿅 빠진다. 갓 쓴 해태처럼 무춤 무춤 수염을 빳빳이 세웠으나 그건 계면쩍어 괜히 그러는 것이렷다. 온몸이 녹작지근해지고 정신이 핑 돌아 나사가 풀어진다. 간질간질 꽃봉오리 신열이 돋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참다 참다 못 참겠다는 듯이, 콘크리트 벽이 갈라지듯이 뿌지직, 소릴 지른다. 몸이 달궜다는 신호다.

내가 누구인가. 눈치 빠르기로 말하자면 춘향 어멈을 뺨치는 나다. 불꽃이 나무를 껴안고 말캉말캉한 로맨스를 즐기고 있는 이때쯤, 서로 내몰리며 아궁이에서 복닥복닥 장난질을 치고 있는 이때쯤 끼어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다. 소매를 훌훌 걷어붙이고 두꺼운 상자를 북 찢어 아궁이 속으로 던진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달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것들은 서로 엉키어 마음을 헹궈 짰다. 아무렇게나 휙 휙 던져도 달착지근한 불꽃 물에 젖어 있으니 석유를 끼얹은 격이다. 타닥타닥 불똥이 튄다. 활활 자지러진다. 타거라, 어서 타거라. 통장작을 끼워 넣는다. 까무러지도록 불보라가 친다. 무엇이든 바싹 태워버릴 자세다.

나무는 처절하게 자신을 태워 죽어도 근사하게 세상을 떠난다. 나무 타는 냄새가 매콤하니 향기롭다. 담백하면서도 고순 내가 는개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밖으로 시나브로 퍼져간다. 나무 타는 소리는 실로 다양한 소리의 결을 지녔다.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 같기도 하고, 머리를 가지런히 치는 미용사의 가위 소리 같기도 하고, 무쇠솥에서 옥수수가 보글보글 삶아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석양이 검실검실 밀려오는 저녁참, 산동네 골목 작은 집 한 채 지붕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당 어귀에선 불꽃 튀는 소리가 고즈넉이 들려온다. 이 소리와 연기가 없다면 산골은 얼마나 적막할까. 이 가난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고정관념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어린아이가 된다. 소리가 점차 가슴으로 젖어 들어 굳어버린 머릿속을 말갛게 씻어 내린다. 친구의 얘기 소리처럼 다정스러운 저 소리를 사랑한다.

산자락에 오두막 하나 지어놓고 풍경처럼 처박혔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목초 냄새 맡으며 이런 비생산적이고 황홀한 엑스터시 속에서 놀고 있다. 첫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불 때는 일이다. 불씨 살리는 일은 산촌 사람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석양이 내릴 때때는 군불은 하루라는 시간이 주는 은총이요, 어스름한 꼭두새벽에 눈뜨자마자 때는 군불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눈부신 하루에 대한 기대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단법석이던 아궁이는 수반에 담긴 물처럼 조용하다. 맹렬한 기세로 나무를 덮치던 불꽃이 온데간데없다.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 전쟁이 끝나 평화가 찾아와도 유분수지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적거린다. 모두 소각되었다. 꼬장꼬장한 선비의 자태를 닮은 소나무도, 옹이가 옹골찼던 참나무도 사그라졌다. 그까짓 게 다 무어냐는 듯 재만 남았다. 저렇게 사라질 걸 그토록 뜨거웠나. 배신감마저 든다.

불꽃을 가만히 보노라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수직으로 타오른다. 지상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천상의 세계를 지향하는가. 하늘로 화살을 꽂는다.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의 비상인가. 곧게 타오른다. 얼마나 자신을 태워버렸기에 저토록 가벼울 수 있을까. 강렬한 무언가가 가슴에 턱 박혀버렸다. 내 마음에 씨눈을 틔워주었다. 삶에도 다시 타오르게 해야 할 많은 것이 있다고. 내 속에 묻힌 인간을 일으켜 세우라고. 말라비틀어진 내면을 불에 태우라고.

나는 작은 것일지라도 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면 심한 상처를 받았다. 그로 인해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내 몫을 탕진해서라도 거절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누구에게든지 과잉 친절과 과잉 충성을 바쳤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늘 좌우되었다. 달리기는 남이 달리는데 숨은 내가 찼다. 언뜻 보기에 그런 내 모습은 휴머니스트같이 보였으나 과장된 열등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위장된 허위였다. 나는 나에게 소외되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자유로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던가. 그 컴컴한 심연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처박아야겠다. 내 심장을 물어뜯는 것들과 혈투를 벌여야겠다.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서둘러야 한다.

나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눈물 찔끔, 콧물 탱 풀며 군불을 땠다. 그 눈물과 콧물이 세파에 찌든 때를 벗겨냈다. 절망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부러워하고 싶지 않다.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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