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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래된 토막글 4쪽 / 유경환

부흐고비 2021. 1. 12. 08:38

절가는 길


통나무를 짤막하게 잘라, 비탈진 산길에 가로 박아놓았다. 시멘트나 돌층계와 다른 부드러움을 받는다. 절 스님이 만든 나무층계이리라. 오래된 모습, 드러난 껍질엔 곰팡이버섯이 돋아있다.

길 양쪽에 소나무들이 들어차 터널이 된 산길은, 바람의 통로처럼 시원했다. 길을 덮다시피 한 솔가지는 볕을 막아 그늘이 두껍고 솔향까지 향긋이 괴었다.

솔바람은 어느 새 땀방울을 걷어갔고, 적요 한가운데서 저절로 두 팔이 올라가 가슴이 펴졌다. 심호흡을 시작하니 가슴 아래 복부까지 상쾌했다. 이런 맛에 산에 오는 것이다. 아무도 묻지 않는데, 대답을 나 스스로에게 했다.

미처 다 삭지 아니한 붉은 솔잎이 뿌리 틈새에 남아 있다. 솔잎도 낙엽이 되면 붉어진다. 한 세상을 살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과정에서 색깔이 변한다. 푸른 영혼이 떠나간 색. 검은색으로 한 번 더 바뀌면 그 때엔 흙이 되리라.

붉은 솔잎은 순리(順理)를 기다리느라 아무 몸부림 없이 평안을 취하고 있다. 솔잎으로서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소나무를 굵게 키워 올린 것이 그 동안의 일몫이었다. 이렇게 자란 소나무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일찍 목숨을 잃었다.

죽은 것을 일정한 높이로 잘라 동그란 토막으로 만들고 비탈진 곳에 가로 나란히 박았다. 밟고 다니기에 좋을 뿐 아니라 큰 비에 쓸려 내릴 토사도 막는다. 죽은 나무를 지혜롭게 쓴 예이다.

길은 산 숲으로의 안내자, 어디쯤에서 절로 연결될 것이다. 다른 곳은 밟히지 않아 숲으로 보호된다. 이런 길에서 죽은 나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라, 죽어서도 산에서 좋은 일을 맡았다. 나무로서는 더 바랄 것이 있을까.

사람도 이런 일몫을 죽은 뒤에 할 수 있겠지. 생전에 닦은 학문이나 예술, 연구 업적 또는 덕으로써 디딤돌 일몫을 능히 할 수 있으리라. 나무 층계를 부드럽게 밟고 다시 오르다 뒤돌아보니 빽빽한 소나무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고 있다. 마침내 길은 감춰지고 사라진다. 길은 그 자체가 자연의 덕이다.(1990)

 


단잠

 

책을 읽다가 눈이 피곤하여 침대에 벌렁 눕는다. 잠시만 눈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는다. 한 10분 또는 20분쯤, 짧은 잠을 청한다. 어떤 때엔 깨어나, 그 새 30분이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잠이다.

이렇게 자고 나면 머리가 가볍고 기분이 산뜻해진다. 푹신한 침대 탄력과 손등까지 덮인 담요의 부드러움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가족을 두고 온 혼자만의 기숙사 생활이다.

잠깐 잠든 사이에 누군가 가벼운 담요를 덮어 주었다.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내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나의 단잠을 도와주려 마음을 쓴 것이다.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할까. 아니, 언젠가 알게 되겠지. 다만 그 사람의 마음을 고마워하고 또 부러워한다.

내게도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언젠가는 오겠지 싶다. 고마움을 받고서야 갚을 생각을 하다니……. 이것이 나의 됨됨이였는가. 혹 이기주의라는 것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아니, 순수한 것으로 여기고 싶다.

정말 아무것도 속마음으로 바라는 것 없이, 누구엔가 그렇게 마음을 쓰고 싶다. 그렇게 부드럽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따뜻한 것을 이웃에게서 배운다. 이런 것을 배우러 예까지 왔구나. 그렇구나.

다시 책을 든다. 하지만 눈에 글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만 일어선다. 아무것도 마음에 정한 것 없이 기숙사를 나온다. 누군가와 만나고 싶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라 대학 도서관도 문이 닫혔다. 거리엔 눈밭을 지나온 바람이 가득하다. (1980. 앤 아버에서)

 


토끼 기르던 시절

 

초등학교 시절 겨울 한 철엔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 빠질 수 없었다. 선생님은 큰 그물을 들고 나섰고, 우리들은 나무칼을 들고 나섰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고기가 귀해서 토끼 고기를 이런 식으로 나누어 먹었다.

해방 뒤에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토끼 기르기를 권했다. 나도 토끼를 길렀다. 사과 궤짝의 한쪽을 철사로 엮어 토끼장을 만들었다. 학교에 오며 가며 넝쿨젖풀이나 씀바귀 그리고 토끼풀을 뜯었다. 새끼를 갖게 되면 비지를 사다 먹였다. 쫑긋한 귀, 빨간 눈, 하얀 털의 부드러움이 귀여웠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낳았다. 새끼 낳을 때가 되면 천으로 가려주었다.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해서 가려 놓은 토끼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취미가 토끼 기르기냐고 할 만큼 정성을 들였다.

남쪽으로 내려온 뒤 토끼 사육은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시장에 가서 토끼를 보면 고향에서 토끼 기르던 시절을 떠올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수유리에다 내 문패를 처음 달아본 집을 마련하고 나서, 토끼 기르기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과 토끼 먹이를 뜯으러 다니면서 함께 옛날로 돌아가 보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내 어렸을 적처럼 관심을 두지 아니했다. 아내도 냄새가 난다며 시큰둥했다. 봄에 시작한 토끼 기르기를 결국 겨울 전에 그만두어야 했다.

토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했다. 어머니의 어깨데기를 만들어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그 때 일흔인 어머니는 어깨가 시리다고 하셨다. 토끼털 가죽을 등판에 댄 어깨데기를 생각하며 잔인한 작업을 하였다.

볕을 따라다니며 털가죽을 말렸다. 기름기가 빠져야 가죽이 부드러워진다. 화학 처리를 않고 볕으로만 빼자니 한겨울이 지나도록 그냥 뻣뻣했다. 그러다 그 해 겨울이 가고 다시 이사를 했으며, 직장에서의 내 일이 바빠져 어느 이삿짐 속에 들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토끼털 어깨데기를 입고 내 집에 오셨다.

“어머니, 참 좋군요.”

어머니는 누가 사주었다는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로 내게 눈길을 주셨다. 그러나 내겐 아픈 찔림이었다. 10년이 지나도 그 아픔은 무디어지지 않았다.(1970)

 


기찻길

 

언젠가 소년 시절 동무와 둘이서 기찻길을 걷다가 나눈 대화가 아직도 기억 속에 있다.

“기찻길은 끝내 만나지 않고 나란히 갈까?”

“그래, 만나는 일 없어…….”

“언제까지나?”

“글쎄…….”

“아닐 것 같은데…….”

“아닌 것 같다고?”

“그래, 만날 때가 있어.”

“언젠데?”

“방향을 바꾸면서 옆길로 들어설 때.”

“그렇구나. 넌 어떻게 아니?”

“……….”

“……….”

동무와 나는 여기서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도 마음을 바꾸면 만날 수 있어.”

조금 뒤 동무는 나와 기찻길을 번갈아 보더니, 송곳으로 찌르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짐짓 웃었다. 잘못 말한 것처럼. 동무는 단발머리 계집애였다.(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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