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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호랭이 물어갈 인간 / 김지헌

부흐고비 2021. 1. 19. 08:48

타고 난 성격 탓인지, 느긋한 인생관 탓인지 그 이유를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나는 대부분의 일을 빨리 해내지 못한다. 그 느린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였지 싶다. 바쁜 농번기 철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정지에서 채전으로, 우물가로 달려다니셨다. 그 와중에도 나는 측간에 가 앉으면 들고 있던 종이쪽의 글씨들을 닳도록 읽고, 흙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기운을 잡아 갖고 놀거나, 떠다니는 먼지들을 움켜쥐다가 어머니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엉덩이를 들어 냄새나는 그곳을 나오곤 했다. 그런 나를 본 어머니의 일갈은 한결같았다. “이 호랭이 물어갈 놈의 가시내야, 똥 집어먹고 자빠졌냐?”

오늘도 그랬다. 몇 가지 서류를 마감일에 간신히 맞춰 들이밀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느긋하게 학교에서 나왔다. 일상이라는 생활 리듬이 그렇듯, 정해진 기간에 맞춰 급한 일들을 해결하고 다소 시간이 여유로워지면 밀어뒀던 일들이 비로소 떠오른다. 영화 보기, 책상 위에 쌓아둔 밀린 책 보기, 그리고 내 일 처리하느라 며칠 간 가족들에게 소홀한 미안함을 보상하기 위해 시장 보기 등속이었다. 먼저 비디오 가게에 들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가족의 탄생’을 빌렸다. 과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어떤 시간이며, 새로운 가족은 어떻게 탄생되는지 미리 상상하며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아이고, 이 호랭이 물어갈 년아! 언제 다 팔라고 그러냐. 대충대충 퍼줘.”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의뭉스런 어둠이 내색 없이 스며드는 저녁 시간이었다. 길가에 좌판을 펴고 앉아있던 아낙네들도 나머지 물건들을 떨이로 팔고 서서히 일어서서 집으로 달음박질 할 때가 된 것이다. 거칠 것 없이 소리치는 오십대의 여자는 제 물건 떨이로 팔 손님 잡으랴, 옆에 있는 리어카에 실린 생선도 팔랴 이리저리 오가며 분주했다. 그 광경이 시선을 붙잡아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리어카엔 갈치와 황석어와 생태가 절반도 팔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던 여자는 나를 보자 만원에 세 마리 팔던 갈치를 네 마리 주겠단다. 가족이 좋아하는 갈치이니 그걸 사고 싶긴 하나 크기가 작아서 선뜻 내키지 않았다. 구이를 하려면 좀 더 큰 것이어야 했다. 더구나 갈치는 싱싱하지 않아 내장이 삐져나온 것들이 많았다. 여자의 태도로 보아 갈치를 손질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순간,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잘 손질된 갈치를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돌아서려 했다. 그때였다.

“이 호랭이 물어갈 년아, 어쩌자고 대낮부터 술을 퍼먹고 그려. 이것 오늘 못 팔면 어쩐다냐.” 무엇이 나를 붙들었을까. 여자의 지청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도 말했다.

“아줌마, 갈치 주세요. 근데 토막 좀 내주세요.” “오메 어쩔거나. 저것이 칼질이나 헐 수 있을랑가 몰라. 아야, 어서 와서 이것 좀 손질해라.”

여자는 망설이던 내가 그냥 돌아설까봐 조바심치는 눈치였다. 갈치 네 마리를 집어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아낙 앞으로 던졌다. 어둠에 가려 표정을 알 수 없던 아낙이 도마를 꺼내며 휘청거렸다. 피식, 흔들리는 자신의 몸에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아낙의 얼굴을 그때서야 쳐다보았다. 서른 초반의 나이. 도마는 깨끗했다. 오늘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굼뜬 동작으로 아낙이 그 위에 갈치를 올려놓았다. 길이가 긴 갈치는 좀체로 반듯하게 놓이질 않았고, 갈치 네 마리를 도마에 올려놓고 가지런히 잡아보려는 아낙은 자꾸 헛손질을 해댔다.

“저러다 손을 베면 어쩌죠?” 나는 걱정이 되면서도 그냥 가져가겠다는 소리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젊은 것이 오죽허면 대낮부터 저렇게 술을 먹었을 것이요잉?” 여자가 미안한 듯이 내게 아낙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다.

“술, 마실 수도 있지요. 너무 야단 치지 마세요.” 그리고 그 다음 말들은 내 목울대로 삼켜버렸다.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같이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게 인생이라고 말해버리면 서른 초반의 여자에겐 너무 가혹한 것이겠지. “그렇지요? 술 마실 수도 있지요잉? 에이 한 마리 더 줘.” 아낙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한순간일망정 내 마음을 그녀가 읽어서였을까. 자신을 이해해주는 내 말 한 마디에 헛손질하던 아낙은 원군을 얻은 듯한 기분인지 갈치를 한 마리 더 얹어주었다. 더 준다는 걸 뿌리치지 못하고 속없이 나는 갈치 다섯 마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준비를 하며 갈치를 다시 다듬었다. 갈치는 내장이 삐져나오기도 하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칼자국은 한없이 비뚤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씻으며 나는 아낙의 마음을, 그녀의 어깨에 얹힌 생활의 무게를 만지는 것 같아 매우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집에 와서 손질할 것이라면 까탈 부리지 말고 그냥 가져올 걸. ‘네가 호랭이 물어갈 인간이다.’ 누군들 그런 순간 없이 완벽하게 살아갈까마는 내 앞에서 헛손질하며 느꼈을 젊은 아낙의 자조적인 서글픔과 비애스러움을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때로 취하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하고, 헛손질이 잦기도 하는 남루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늘밤은 젊은 아낙의 헛손질이 자꾸 눈에 밟혀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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