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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개구리에 관한 단상 / 박주희

부흐고비 2021. 1. 18. 12:17

봄철 들판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 겨울 동안 굳었던 땅이 해빙하는 동안 흙과 흙 사이가 헐거워지고 있다. 대지가 숨을 쉬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여기저기서 흙을 갈아엎는다. 땅이 간직한 수분과 영양분을 작물이 쉽게 빨아들이도록 농사 준비를 한다. 개구리가 나온다는 경칩도 멀지 않았다. 봄이 익고 있다.

꽃샘추위가 느슨해지면서 바깥으로 나가는 횟수가 늘어간다. 겨울동안 몸이 무거워진 탓인지 외출하며 활동량이 많아질수록 기력이 모자란다. 나도 봄 들판같이 진즉부터 몸갈이를 하고, 보양식이라도 챙겨 먹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흙을 지켜보면서 새삼 부실해진 변화를 깨닫는다.

칠십 년대 후반 즈음 나는 대여섯 살이었다. 도시에 살았지만 오빠들이 방학을 하거나 종가집인 외가에 행사가 있게 되면 시골에 갔다. 외가는 칠갑산을 포함해 산이 많고 볕이 잘 든다하여 이름 붙여진 청양에 있었다. 읍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들어가야 하늘과 땅 사이로 논, 밭이 펼쳐진 시골집에 다다랐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그곳이 초등학생 때 자주 갔던 두메산골의 외가다.

시골 아이들은 사철 자연과 함께 놀았다. 겨울에는 빨강 내복을 입고 산토끼를 잡는다고 골짜기를 쏘다녔다. 봄이 되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니며 냉이, 달래, 쑥을 소쿠리 가득 뜯었다. 여름이면 발가벗고 냇가에 나가 멱을 감았다. 가을이면 짚 모자를 쓰고 어른들의 논밭 일을 돕는 흉내를 냈다. 그러나 아이들은 원래 설치고 널린 먹거리를 맛보러 다니는 게 주특기다. 자연과 어울려 노는 게 아이들의 주요 하루 일과였다.

해가 뉘엿 넘어갈 즈음이면 자기들끼리 놀던 오빠들까지 합세했다. 냇가 옆 자갈밭에 돌을 쌓아 임시 화덕을 만들고 불을 지폈다. 계절에 따라 봄이면 개구리, 여름이면 피라미,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아 불 위에 놓았다. 겨울에는 사랑방에 딸린 아궁이로 옮겨 가래떡을 구워 먹었다. 나는 개구리나 메뚜기를 먹지 못했다. 그때 오빠가 그것들을 먹으면 동네 아이들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 한다고 부추겼다. 눈 질끈 감고 한 번 먹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두 번째는 눈을 감지 않고 먹었다. 세 번째는 혀로 입안을 굴리며 음미했다. 억지로 먹던 개구리 맛조차 고소하고 달보드레하게 느껴졌다. 개구리는 팔딱팔딱 뛰어다닐 수 있다하여 내 좋은 주전부리가 되었고 설치는 힘도 강해지는 것 같았다.

대전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을 보냈다. 자연 시간에 개구리 해부를 했다. 남자 형제가 많은 틈에서 자라서인지 노는 것이든 옷 입는 것이든 선머슴 같았다. 개구리에 대해서는 눈구경이든 입맛이든 반 전문가가 되었다. 여덟 개조 중 네개 조의 실험에 필요한 개구리 네 마리를 내가 잡아서 마취시켜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징그럽다며 옆에서 구경만 했다. 실험하는 중에 마취가 풀린 개구리 두 마리가 교실바닥을 뛰어다녀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자연 시간이 끝나고 해부 당하지 않은 개구리와 마취가 풀린 개구리를 냇가에 놓아주었다.

방과 후 개구리 세 마리를 다시 잡아서 옆집 아이들과 놀았다. 그 중에 한 마리정도는 자연시간에 놓아준 개구리였는지도 모른다. 달리 놀만한 것이 없었다. 오빠들과 외가에서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던 생각이 나서 뒷다리 빼는 법을 다른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가지고 놀던 개구리 한 마리가 손에서 벗어나 내장을 보인 채 도망쳤다. 겉으로 드러난 장기臟器가 땅에 쓸려 아픈지 걷는 게 힘들어 보였다. 내장을 끌며 도망가는 개구리가 불쌍하다 못해 참혹하여 쫓지 않았다. 다시는 개구리 잡는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후 실제로 개구리를 잡지 않았다. 몸보신 겸 간식처럼 먹던 개구리도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무더위가 사그라지는 여름밤에 개구리는 사방에서 울었다. 평상에 누워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하는 소리를 들었다. 밤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별을 헤아리며 사촌들과 속닥거렸지만 개구리 소리는 서늘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먹은 개구리, 내가 잡은 개구리, 내가 해부한 개구리…. 그때 내 나이 열 셋이었다.

오늘 시를 한 편 읽었다.

창자가 흘러나온 개구리를 던져놓으면/헤엄쳐 간다/오후의 바다를 향해/목숨을 질질 흘리면서/알 수 없는 순간이/모든 것을 압수해갈 때까지/볼품없는 앞발의 힘으로/악몽 속을 허우적거리며/남은 몸이 악몽인 듯 간다/잘들 살아보라는 듯 힐끔거리며 간다//다리를 구워 먹으며/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도시로 헤엄쳐 갔다.
김일영, <바다로 간 개구리> 전문

보약으로 먹고 해부하느라 무참하게 생명을 빼앗은 개구리를 다시 생각한다. 가슴으로 싸한 기운이 흘러든다. 자연 실험을 하고 냇가에 버린 개구리들은 그 후 어디로 갔을까. 옆집 아이들과 장난쳤던 개구리는 어디로 갔을까. 불에 구워 먹은 개구리가 먹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디 있을까. 시절이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그랬지만 개구리가 얼마나 대단한 보약이 되었을까. 개구리 실험을 하고 놓아줄 때 잘 살라고 위로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를 읽으니 기어가며 힐끔 올려보던 개구리 두 눈이 지금의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약해진다. 그것은 다행이면서 불행이다. 그 이중감정이 철부지 행동과 철든 행위를 구분한다. 언제부터 이런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되짚어 보아도 뚜렷한 시점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인지, 자주 앓던 잔병을 정리한 때인지, 개구리를 더 이상 먹지 않은 때인지 알 수가 없다.

역지사지이다. 지금의 내 입장이 개구리가 된듯하여 몸이 떨린다. ‘목숨을 질질 흘리면서’도 두 발 두 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삶이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는다. 나와 한때 만났으나 좋은 연連이 되지 못한 개구리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무심히 살다 갔기를 묵념한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살았기를. ‘잘’은 아니어도 ‘그냥’ 살았기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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