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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래된 골목 / 정영숙

부흐고비 2021. 1. 18. 08:55

‘인문학적인 집 석류 5호’

골목을 들어서자 특이한 문패가 시선을 잡았다. 직사각형을 교묘히 겹쳐 놓은 듯 세련된 집이었다. 한참동안 서서 그 집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이 있던 곳인데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내가 그리던 골목안의 모습은 사라지고 낯선 집들로 촘촘하다.

십여 년 전에도 그랬다. 문화예술회관에서 학원장들의 연수교육이 있던 날, 무슨 마음이었는지, 근처 그 오래된 골목이 생각났다. 연한 나뭇잎들이 마음을 간질이고, 봄 햇살이 와그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큰길 건너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초입이 짧아졌다. 탱자나무 울타리도 사라졌다. 그런대도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그리움이 아지랑이로 서성댔다.

내가 살던 집을 찾았다.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대문 옆의 키 큰 가죽나무가 생각났다. 둘러보니 옆으로 한참 비껴간 곳에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마음속의 돌담 하나가 툭! 힘없이 무너졌다. 툇마루에서 놀던 햇빛과 바람이 아직 선한데, 맞닥뜨린 건 휑한 공간과 잡초가 가득한 넓은 빈터였다. 집 앞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멘트를 발라 흔적만 남았다. 나는 그 위에 화석처럼 서서 넓은 빈터를 바라보았다.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듯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사춘기의 기억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마당이 넓은 그 기와집엔 네 가구가 살았다. 방 한 칸과 부엌하나. 우리 가족은 뒤쪽에 있는 방에 세 들었다. 집 옆과 뒤로는 넓은 식물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하느라 늘 집을 비웠다. 나는 뒤란에서 혼자 노는 것이 좋았다.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다가도 슬쩍 뒤란으로 갔다. 거긴 나만의 비밀 공간 같았다. 혼자 앉을 수 있는 큰 돌과 색색으로 변하는 수국은 말없는 친구였다. 식물원의 나무들이 울이 되어 아늑했다. 그곳에서 동네 차장 언니가 준 여성잡지를 처음으로 읽었다. 대학생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통속소설에도 빠져들었다. 여섯 살 막내 여동생을 데려와 막대기로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삶이 팍팍한 엄마는 술에 취하면 자기 연민에 빠져 서럽게 울곤 했다. 그런 날은 골목길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 죽은 가지를 꺾어 모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땔감으로 썼다. 더러는 식물원 나무 아래 숨어서 부잣집 딸이 된 상상의 소설을 썼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도 엄만 자기 설움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가방만 내려놓은 채 빗속으로 내달렸다. 뭔가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초등학교 옛 정문 앞의 친구네 점방까지 가서 놀다 오기도 했다. 그땐 그곳까지가 아주 멀었다. 친구는 언제나 풀빵을 굽고 있었다.

어스름 해가 질 때면 성당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뎅그렁뎅그렁 소리를 가슴으로 들었다. 종소리는 신비롭고 아득해서 뛰어 놀다가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가끔 회색옷의 외국 수녀들이 지나갔다. 큰 키와 움푹한 눈이 신기했다. 나는 보자기를 머리에 둘러 감고 수녀의 모습을 흉내 내곤 했다.

가죽나무 아래에 대여섯 명의 여인네들이 평상에 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낯이 익었다. 저 안쪽 작은 골목 안에 살던 젊은 아주머니가 이젠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있다. 양동이를 이고 가던 뒷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골목길 사이사이,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다른 집들은 다시 지은 듯한데 기덕이 오빠네만 곧 허물어질듯 낡은 집 그대로였다. 기덕이 오빠는 내가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교문을 나설 때 갑자기 나타나 꽃다발을 안겨주곤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었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왜 이런 것들이 생각날까. 보잘것없고 시시한 기억들이 가슴 밑바닥을 휘저으며 울컥 몰려온다. 별로 가진 것도 잘난 것도 없던 골목안 사람들은 어디서 오늘을 어수룩하게 보낼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면들이 가물가물하다.

십여 년 만에 다시 걸어본 오래된 이 골목. 열 두서너 살의 내가 거기에 서 있다. 그늘진 무늬들로 짜진 생의 한 때, 내 봄날이 그리운 것인가. 구겨진 도화지를 다시 펼치면 그 골목 끝은 언제나 성당이 있었다.

성긴 기억 한 줄 덧대는, 무심한 한낮이 멈출 듯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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