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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 이시영
몽돌밭에 낮은 파도 몰려와 쓸리는 소리
세상에서 가장 작고 낮은 그 소리
그네 / 이시영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봄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애련哀憐 / 이시영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순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
오동도 / 이시영
이 바람 지나면 동백꽃 핀다/ 바다여 하늘이여 한 사나흘 꽝꽝 추워라//
사이 / 이시영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시詩 / 이시영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화살 / 이시영
새끼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신생新生 / 이시영
겨울나무의 찬 가지 위로 올해의 가장/ 매서운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가자/ 땅속의 앞 못 보는 애벌레들이 제일 먼저 알고/ 발그레한 하품을 한다.//
골짜기 / 이시영
“시응이 갸가 요지음 놀고 있는갑습디다요……”/ “어찌 그까 이……”/ “………”/ “………”// 어느 초라한 무덤가에 빈 소주병 하나/ 그리고 빗물에 방금 씻긴 듯한 깨끗한 종이컵 하나//
하동 / 이시영
하동쯤이면 딱 좋을 것 같아. 화개장터 넘어 악양면 평사리나 아, 거기 우리 착한 남준이가 살지. 어쩌다 전화 걸면 주인은 없고 흘러나오던 목소리. “살구꽃이 환한 봄날입니다. 물결에 한 잎 두 잎…”.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 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배틀재 토지 동방천 화개… 빨리 빨리 타이소!” 하며 엉덩이로 마구 승객들을 들이밀던 차장 아가씨도 생각나네. 아니면 인호 자네가 사는 금성면도 괜찮아. 화력발전소가 있지만 설마 터지겠어? 이웃에 살며 서로 오갈 수만 있다면! 아니 읍내리도 좋고 할리 데이비슨 중고품 몰고 달리는 원규네 좀 높은 산중턱 중기마을이면 또 어떠리. 구례에는 가고 싶지 않아. 마음만 거기 살게 하고 내 몸은 따로 제금을 내고 싶어. 지아는 지가 태어난 간전면으로 가고, 두규도 거기 어디에 아담한 벽돌집을 지었다더군. 설익은 풍수 송기원이 허리를 턱하니 젖혀 지세를 살피더니 ”니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했다며?//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혔지만 가녘에 반짝이던 은빛 모래 사구들. 김용택이 사는 장산리를 스쳐온 거지. 용택이는 그 마을 앞 도랑을 강이라고 우겼지만 섬진강은 평사리에서 바라볼 때가 제일 좋더라. 그래, 코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는 작은 마당으로.//
마음의 고향6 – 초설 /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노래 / 이시영
사랑한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드리기 위해/ 이 강에 섰건만/ 바람 이리 불고 강물 저리 붉어/ 못 건너가겠네 못 가겠네// 잊어버리라 잊어버리라던 그 말 한마디 돌려드리기 위해/ 이 산마루에 섰건만/ 천둥 이리 우짖고 비바람 속 낭 저리 깊어/ 못 다가가겠네 못 가겠네// 낭이라면 아득한 낭에 핀 한떨기 꽃처럼,/ 강이라면 숨막히는 바위 속,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은빛 찰나의 물고기처럼//
형제 / 이시영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누님은 살았을 적 키가 껀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빼닮았다 말하고 그런 누님을 가리켜 나는 젊었을 적 우물가에서 볼우물이 환한 웃음을 웃던 어머니의 옆 얼굴을 그대로 닮았다고 했더니 수줍은 듯 호호 입을 가리고 웃었다. 찌는 듯한 여름 해가 좀체로 지지 않는 전주시 중노송동 노송탕 옆 반지하 셋방. 오랜만에 우리 둘이는 서로의 시큰한 뼈들을 안고.//
당숙모 / 이시영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걸어와 후다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이시영(李時英, 1949년 8월 6일~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학하였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지용 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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