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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곽재구 시인

부흐고비 2021. 1. 18. 16:50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 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계단 / 곽재구

강변에서/ 내가 사는 작은 오막살이집까지/ 이르는 숲길 사이에/ 어느 하루/ 마음먹고 나무계단 하나/ 만들었습니다/ 밟으면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가 산뻐꾸기 울음/ 소리보다 듣기 좋았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이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집을 찾을 때/ 있겠지요/ 설령 그때 내게/ 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神이 찾아와/ 자, 이게 네가 그 동안 목마르게 찾았던 그 물건이야/ 하며 막 봇짐을 푸는 순간이라 해도/ 난 당신이 내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神과는 상관없이/ 강변 숲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새벽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 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낮달 / 곽재구

송광사 뒷산 계곡 장안(長安) 마을/ 김복순 할머니가 토란국을 끓일 때는/ 마당 앞 돌각담 가에서/ 사십 년 넘게 자라는// 들깨를 가루 내어/ 한 주먹 푹 국솥에 넣어 끓이지요/ 그 토란국을 자실 때에/ 이빨 다 빠진 할머니는/ 입술로 오물오물 국물을 들이켜는데/ 일찍 뜬 낮달 하나가/ 처마 밑 제비집 근처까지 내려와서// 할머니 쉬었다 자시지요/ 된장 속에 묻은 무장아찌랑/ 들깻잎이랑 다 맛 들었구 말구요// 꼭 그렇게 말참견을 하지요/ 그럴 때 할머니는/ 오냐 내 새끼 효자다/ 오냐 내 새끼 효자다/ 국그릇 들고 마루 끝에 서서/ 하염없이 북녘 하늘 보지요/ 살아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아들 생각 젖지요.//

 

 

편지 / 곽재구

섬과 섬 사이로/ 새가 날아갔다/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편지 한 통을 물고//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

 

 

이렇게 지나침 속의 2 / 곽재구

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밀어내는 만큼 떠밀리며 아득하게 깨어지고 있었다./ 두 눈을 멀리 따로따로 내놓고, 아니다, 라는 말로 보는 눈과 보았던 눈 사이를 덮고,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두고, 보이지 않더라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두고, 몸뚱이는 그대로 둔 채 속으로 허물어지는 그런 몸짓을, 뱉을 수 없는 삼킴마냥 눈멀도록 떠들게 떠들게.//

 

인도 / 곽재구

챔파꽃이 피는 강변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큰 도시의 공장으로/ 다른 소년이 일하러 나가는 동안/ 소년은 늘 혼자였습니다/ 물소들이 두 개의 뿔과 코만을 수면 위에 띄워 놓고/ 강둑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강을 건너는 물소들의 뿔마다/ 챔파꽃 한 가지씩을 걸어주었습니다/ 챔파꽃 화관을 쓴 물소들이/ 끝없이 강을 건넜습니다/ 물소들은 이 세상의 어느 끝을 살다가도/ 이 강변을 향하여/ 어슬렁 어슬렁 걸어왔습니다/ 물소들은 챔파꽃 화관을,/ 소년을 사랑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챔파꽃 피는 강변에/ 한 늙은 뱃사공이 살았습니다/ 강을 건너는 물소들의 뿔에/ 챔파꽃 가지를 매달아주며/ 언젠가 물소가 되어 돌아올 그 자신을 기다렸습니다.

 

 

 


 

곽재구(郭在九, 195411~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5411일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와 숭실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1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사평역에서,서울 세노야,참 맑은 물살등이 있고, 기행 산문집으로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곽재구의 시는 화려한 문구로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생의 풍경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작동시킨다는 평을 받는다. 1981중앙일보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등과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등을 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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