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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백석 시인

부흐고비 2021. 1. 18. 16:03

 

국수 / 백석(白石, 1912~1995)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대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한 흰 김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워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 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고담)하고 素朴(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는 1930년대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한 시인 백석이 1941년 ‘문장’지에 발표한 작품으로,

눈 오는 날 국수를 함께 나눠 먹던 고향 마을에 대한 추억과 회상을 다루고 있는 시이다.

 

 

/ 백석

머리 빗기가 싫다면/ 니가 들구 나서/ 머리채를 끄을구 오른다는/ 이 있었다/ 너머에는/ 겨드랑이에 깃이 돋아서 장수가 된다는/ 더꺼머리 총각들이 살아서/ 색시처녀들을 잘도 업어간다고 했다/ 마루에 서면/ 멀리 언제나 늘 그물그물/ 그늘만 친 건넛에서/ 벼락을 맞아 바윗돌이 되었다는/ 큰 땅괭이 한 마리/ 수염을 뻗치고 건너다보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도 그 쉬영꽃 진달래 빨가니 핀 꽃바위 너머/ 잔등에는 가지취 뻐꾹채 게루기 고사리 나물판/ 나물 냄새 물씬물씬 나는데/ 나는 복장노루를 따라 뛰었다.//

 

정주성(定州城) / 백석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 한울빛간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백석이 고향 ‘정주’에 있는 성城을 소재로 삼은 데뷔작. 1935. 8. 31, 〈조선일보〉에 발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백석의 시에 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붙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두 작가의 우정을 보여준다. [사진 근대서지학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조당에서 / 백석

나는 지나(支那)나라 사람들과 같이 목욕을 한다/ 무슨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후손들과 같이/ 한 물통 안에 들어 목욕을 한다/ 서로 나라가 다른 사람인데/ 다들 쪽 발가벗고 같이 물에 몸을 녹이고 있는 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가끔 틀리고 먹고 입는 것도 모두 다른데/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물에 몸을 씻는 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쭉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하니 다리털이 없는 것이/ 이것이 나는 왜 자꾸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 누워서/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 듯한 목이 긴 사람은/ 도연명은 저러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또 여기 더운 물에 뛰어들며/ 무슨 물새처럼 악악 소리를 지르는 삐삐 파리한 사람은/ 양자(楊子)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와 같았을 것만 같다/ 나는 시방 옛날 진(晉)이라는 나라나 위(衛)라는 나라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이리하여 어쩐지 내 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위(衛)며 진(晉)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더운 물에 몸을 불키거나 때를 밀거나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제 배꼽을 들여다보거나 남의 낯을 쳐다보거나 하는 것인데/ 이러면서 그 무슨 제비의 춤이라는 연소탕(燕巢湯)이 맛도 있는 것과/ 또 어느 바루 새악시가 곱기도 한 것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그러나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글쎄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스웁기도 하다//

 

여우난골 / 백석

박을 삶는 집// 할아버지와 손자가 오른 지붕 우에 한울빛이 진초록이다/ 우물의 물이 쓸 것만 같다// 마을에서는 삼굿을 하는 날/ 건넌마을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왔다// 노란 싸릿닢이 한불 깔린 토방에 햇츩방석을 깔고/ 나는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었다// 어치라는 산()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었다고 하였다.//

 

여우난 곬족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 딸 이녀, 작은 이녀/ 열 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기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구손이하고 ,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팔원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 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 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 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서행시초(函行詩抄) 2-북신 / 백석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박혔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커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 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山宿 -山中吟 / 백석

旅人宿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木枕들을 베여보며/ 골에 들어와서 이木枕들에 새깜아니때를 올리고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사람들의 얼골과 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추일산조(秋日山朝) / 백석

아침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 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 ()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아란 한울에 떨어질 것같아/ 웃음소리가 더러 산() 밑까지 들린다// 순례(巡禮)중이 산()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이 산()절에 재()가 들었다// 무리돌이 굴러나리는 건 중의 발굼치에선가//

 

청시(靑枾) / 백석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

 

산비 / 백석

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쓸쓸한 길 / 백석

거적장사 하나 뒷옆 비탈을 오른다/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냔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東風이 설렌다//

 

노루 함주시초2 /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여승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도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모닥불 /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고향(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통영(統營) / 백석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며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북방에서 /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힌밤 / 백석

녯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집웅에 박이/ 또 하나 달걀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2월 142호] 천재 시인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

천재 시인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    백석의 생애와 업적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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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시인’ 백석(1912~1996)의 유일한 시집 ’사슴’ 초판본. 이 초판본은 백석이 이육사(1904~1944) 시인의 동생인 문학평론가 이원조(1909~1955)에게 직접 준 것으로 시집 안에는 ”이원조씨 백석”이라고 적혀 있다.[사진 코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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