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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월부 도둑 / 이응백

부흐고비 2021. 1. 28. 14:52

우리나라에도 작년 세모에 '텔레비젼'의 대량 월부가 있었다. '텔레비젼'을 놓으면 주부가 일손을 쉬게 되고, 애들의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통폐론에도 불구하고 이에 감연히 한몫 끼인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것이 아직 학령 전이요, 월부라는 편리점에서였다. 방의 크기로 보아 14인치라도 그리 작은 감이 없이 잘 조화가 되고, 더구나 화면이 일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농담(濃淡)도 고르고 음향도 깨끗하여, 이 진귀한 문명의 산물이 내방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저녁을 끝내고는 찾아오는 '팬'도 생기게 되었다. 꼬마도 물론 훌륭한 팬 노릇을 했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이 이채로운 텔레비젼도 그리 변변치 못한 우리 살림의 다른 가구들과 제법 어울리게 되어 그대로 자리가 딱 잡히게 되었다. 언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은 그 싱싱한 디자인은 방안에 한결 신선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텔레비젼은 우리 가정에 의젓한 필수품이 되고, 그 시청은 하나의 생리화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 애지중지하던 텔레비젼이 어느 비 오는 새벽, 지붕을 타고 들어온 도둑에게 감쪽같이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흙발로 들어온 그들에게 이끌려 나가며, 그 텔레비젼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했으랴? 같은 방에서 자면서도 전혀 낌새도 못챘던 것은 마취제의 살포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자위하고 있다. 텔레비젼이 앉았던 자리는 보기 흉하리만큼 쓸쓸해 보였다.

더구나 물건은 없어졌어도 월부는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둑을 월부로 맞은 셈이다. 하기야 한꺼번에 맞은 것보다는 이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물이 없는 빈 월부를 부어나가기란 아물렸던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비노니 이홀랑 월부 물건은 월부장까지 가져가는 에티켓을 잊지 말아 주기를 그들 밤손님에게 바라는 바이다.

 


 

이응백(李應百) : 1923년 4월 19일~2010월 3월 29일. 현대 국어학자. 호는 난대(蘭臺)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생지는 경기도 파주(坡州)이다.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1974년 같은 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7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식 국어교육’에 중점을 두어 1955년 현 한국어교육학회의 전신인 국어교육연구회를 결성하여 40여 년간 국어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어교육자로서 국어교육을 위한 한자교육강화를 견지하여 국어교육에서 ‘국한문 혼용론’을 주장하였고, 한자능력검증시험을 최초로 도입한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부터 실시된 한글전용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199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자교육 정상화 국민궐기대회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9년 한글전용법이 폐지되었고, 2000년경부터 한자교육이 다시 강조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저서로 『국어교육사연구』‧『자료를 통해 본 한자‧한자어의 실태와 그 교육』‧『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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