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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선소리 / 정영숙

부흐고비 2021. 1. 29. 08:42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구성진 옛노래가 기타선율에 얹혀 들려온다. 느닷없는 소리에 순간 모두 멈칫했다. 시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첫 제삿날이다. 어머님이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아버님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친척들과 가족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어머님 짐작에 30여 년 전에 녹음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사십 대 중반이다. 목소리가 낭랑하게 젊다. 시숙부님들은 감회에 젖어 연신 감탄하시며 전축 가까이 다가앉으셨다.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하던 나도 잠시 마루 소파에 앉아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디잉 디딩 딩다다 디딩 당~, 아버님의 기타연주와 노래가 아마추어를 넘는 솜씨다.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시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시간만 나면 아버님은 안방에서 기타와 건반악기를 연주하셨다. 그러다가 본인 반주에 맞춰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시곤 했다.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시면 저럴까, 나만 신기해 할 뿐 예사로운 가족들을 보면 늘상 있는 일인 듯 했다.

아버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남편에게 물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도 대화가 없어서 아버지가 어렵기만 하다고 했다. 아버님은 술을 전혀 못하였다. 친구분들이 와도 술상 차릴 일은 없었다. 커피를 아주 좋아하셨다. 식사를 먼저 마치시면 커피를 손수 타서 드셨다. 외출을 하실 때면 언제나 직접 다림질을 해서 바지 주름을 날렵하게 잡아 입고 나가셨다.

작년, 시조부모 제삿날에 맞춰 멀리 사시는 친척들이 오셨다. 제사에도 참석하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아버님도 뵐 겸 해서다. 폐암 진단 받은 지 일 년을 넘기면서 갑자기 악화되어 입원을 하셨다가 가망이 없다 하여 일단 집으로 모셨을 때다. 하필 개천절에 열리는 유등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친 친척들은 온 김에 유등 구경을 가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거의 말씀도 못하시고 의식도 선명하지 못하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내심 긴장하고 있는 터였다.

그럼에도 친척들을 위해 식구들까지 모두 유등을 보러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얼마 안 있어 내가 빠진 걸 알았는지 나오라는 전화가 연달았다. 아버님 혼자 둘 수는 없는데, 알면서도 자꾸 재촉을 하니 좀 난감했다. 부랴부랴 어머님이 들어오셨다. 나보고 어서 가라고.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머님의 재촉에 광장으로 나갔다.

죽음의 그물에 갇힌 이곳은 깊은 침묵인데 길 건너 등꽃 만발한 저곳은 웃음의 화원이다. 강에는 유등이 정물처럼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형형색색의 빛이 강물에 어리어 그윽함을 자아낸다. 고요한 유등과는 달리 둔치에는 갖가지 모양의 등이 행렬을 이루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가고 있었다. 더러는 강가에 서서 폭죽을 터트리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가설무대에선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앉은 사람 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음악소리와 호객소리 폭죽소리가 한 데 뒤섞여 시끌벅적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아버님은 폐암진단을 받고도 담담하셨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셨다. 그랬기에 마음은 쓰였어도 괜찮겠거니, 좀 무심했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외롭고 두려우셨을까. 이제 아버님은 침묵 속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려는데 우리들은 축제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에 떠밀리며 구경에 정신없었다. 나는 사람들에 뒤섞여 들뜬 축제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영 인정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내내 울적했다.

광장에 있는 음악분수에서는 단조의 슬픈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색이 투영된 분수마저 상여꽃 빛깔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물줄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공에 길을 내었다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다시 색색이 차례로 솟아올라 흐느끼듯 제 몸을 뉘었다가 힘겹게 곧추세운다. 물줄기를 감싸듯 하얀 안개가 빙 둘러 머물다 또 사라진다. 소복 입은 여인네가 화려한 휘장에 둘러싸여 명주천 하나 들고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노래마저 갈수록 요령잡이의 선소리처럼 청승스럽고 애달프다. 너울너울 춤추는 저 음악분수는 어쩐지 한 생을 다한 사람에 대한 위로의 춤 같았다. 아버님을 위하여, 이승의 마지막을 위로하는 축제를 베푸는 것 같았다.

수많은 소망등이 둔치의 벽을 따라 은은한 붉은 길을 만들며 줄지어 걸렸다. 누군가를 위한 축원의 등일 것이다. 어쩌면 아버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등불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버님의 저 세상은 이럴 것이라고, 등불 밝힌 환한 길을 흥겹게 기타 치며 노래 부르며 걸어가시는 아버님이 보였다. 구름처럼 환영 나온 이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아버님이 건너가실 새로운 세상,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치가 여기서도 이렇게 중계되고 있는 것이리라. 아버님을 위해 등 하나 달아드렸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길 하나 사이인가. 우리는 넓지 않은 길을 사이에 두고 생과 사를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서둘러 천수교를 건너왔다.

축제가 끝나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면서 가슴에 담아 둔 말이 얼마일까? 평생을 함께 한 아내에게 다 못한 이야기, 그 많은 말을 저 노래에 묻어두고 가셨으리라.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건 이내 심사….’

시간을 되돌리는 노래이슬이 가슴에 멍울멍울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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