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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건삼 시인

부흐고비 2021. 2. 6. 12:38

 흔들리는 것이 바람 탓만은 아니다 / 박건삼

입춘과 우수, 경칩이 있는

2월은 설레임의 달이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2월은

그래서 상큼하다

아직은 설한풍에 비수를 감추고

훈풍의 미소를 띄우지만

난 알고 있지

열여섯 가시내의 젖몽울 같은

수줍음과 부풀음에 떨고 있는

2월은 가슴 설레는 달이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순이에게 바치고픈

삼돌이에겐 너무 짧은 달이지만

3월, 그 첫 휴가를 기다리는

김일병의 깨알 같은 수첩 속의

2월

얼마나 그리운 달인가

보조개가 귀여운

초롱초롱한 소녀 같은
때론

비비드한 말괄량이 선머슴애 같은

애증이 엇갈리는

2월은

변덕스러워 좋다

오랜만에 노사가 손잡고

지하철 파업을 중단하고

시어미와 새댁이

군에 간 아들과 지아비를

손꼽아 기다리며 화해하는

그런 달

2월은

가슴 조이는 모든 이를 설레게 한다

아, 복사꽃 필 날은 아직 멀었는데

남녘에 철 이른 매화 소식이

바람기 있는 누이를 꼬드기고

춘설은 어지러이 날려

올해도

또 한 번 청상의 가슴이 울렁이겠구나


 

어머니를 바다에 묻고 / 박건삼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바다에 묻었다./ 왜 하필 차가운 바다냐고/ 그토록 반대했던 막네 누이가/ 남들이 산으로 성묘 가던 날/ 어머니가 떠난 바다에 와서/ 장미꽃 한 송이 던지며/ 어머니가 모든 생명의 바다라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지천명에도 사랑이 흔들린다 / 박건삼

꿈결이라고 하자/ 분명/ 바람은 죽지 않았고/ 누군가 흐느끼고 있었다// 이끼 낀 돌담길을 돌아 나설 때/ 달빛은/ 제발 추억은 두고 가라 했지만/ 차마 그리움만은 떨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기억할 수 없는 바람과/ 목련 꽃잎처럼 떨어져 간 애절한 세월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울지 않았다// 오늘/ 밤섬엔 밤나무가 없지만/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 이름만으로도 철새가 오고/ 한강은 그리움으로 흘렀다// 지천명의 나이에사/ 비로소 사랑이 흔들릴 때/ 어디선가/ 갈대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네 사랑을 훔치고 싶다 / 박건삼

네가 달이라면/ 나는 달빛을 감싸고 있는 달무리가 되고 싶고/ 네가 별이라면/ 나는 너의 쉼터가 될 은하수가 되고// 네가 한 그루 나무라면/ 나는 너를 감싸 안는 숲이 되고 싶다// 네가 뿌린 숱한 웃음 뒤에 떨어진 우수 속에/ 그리움 하나 주었으면 했는데/ 변심한 건 네가 아니라/ 눈치 없는 내가 바보였구나// 차라리 네 사랑을 훔쳐/ 푸른 바다에 던지면/ 네가 직녀가 되고, 내가 견우가 될까//

 

/ 박건삼 

산다는 건 절반의 기쁨/ 때론/ 고독이란 한줄기 바람에도/ 괴로워 하지만/ 바람이란 스쳐지나가면 그 뿐인 걸// 그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 텅 빈 하늘의 구름 한 점/ 어디로 흘러가는지 묻지 마라/ 흘러가는 모든 건 외롭고 쓸쓸하구나// 산다는 건 그저 그런 것/ 절반의 실패로 끝나더라도/ 서러워 마라// 어차피 인생이란 주소 조차 없는데/ 내일의 삶은 내일의 일/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종착역이라 생각하라// 

 

하찮은 일들에 대한 바람 / 박건삼

아침마다/ 네게 전화를 거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네 목소릴 듣고/ 기다림의 거리를 가늠하고자 함이오// 해질 무렵/ 널 인사동 목로주점에서 만나자는 건/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자 함이다// 오늘/ 비 내리는 밤/ 네게 편지를 쓰는 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빗속에/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함께 젖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찮은 일/ 작은 일들이 모여 하루를 이루나니/ 그대 있음에/ 산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치 않겠다// 

 

사랑은 / 박건삼

사랑은 엔제나/ 놓친 열차같이 아쉬웁고/ 떼론/ 달빛에 흔들리는/ 오동잎새 처럼 여린데/ 홍안의 학창시절/ 귀성 열차에 줄곧 따라오던/ 보름 전야의 달의 기억속에/ 산허리를 돌아서도/ 터널을 지날 때 마다/ 숨바꼭질하며 가슴 졸였지/ 세월이 흘러/ 귀밑머리 잔설이 쌓이는데/ 철없는 젊은이들은 멋있다고하지만/ 그야/ 그럴듯하게 아름다운 먼 풍경일뿐/ 속물로 남아있는 내 인생에 무슨 의미있가// 

 

사랑이 뭔지 가르쳐주세요 / 박건삼 

'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듯/ 사랑 또한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라 했습니다'/ 한없이 주는 게 사랑일까요/ 인간에 대한 존경과 배려/ 무한한 책임 그게 사랑이라면/ 죽을 때까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그러나 전 아직 사랑의 실체를 모릅니다/ 山寺의 종소리가 아무리 은은한들/ 귀먹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늘도 해 저문 텅 빈 들녘에서/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사랑임을 알면서도/ 그대 이름 석 자를 불러 봅니다/ 저녁 놀 속으로 마냥 비껴만 가는 메아리는/ 앙상한 추억의 나무에 걸려 애처로이 펄럭이는데/ 사랑을 받아 줄 당신은 소식조차 없습니다/ 이젠 당신이 제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 때입니다// 

 

사랑이 흔들린다 / 박건삼 

꿈결이라고 하자, 분명 바람은 죽지 않았고 누군가 흐느끼고 있었다./ 이끼 낀 돌담길을 돌아나설 때 달빛은 제발 추억은 두고 가라 했지만../ 차마 그리움만은 떨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기억할 수 없는 바람과 모란 꽃잎처럼 떨어져간 애절한 세월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울지 않았다. 오늘 밤섬엔 밤나무가 없지만../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 이름만으로도 철새가 오고 한강은 그리움으로 흘렀다./ 知天命의 나이에사 비로소 사랑이 흔들릴 때, 어디선가 갈대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고백 / 박건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노라면/ 금세 마음이 저려오고/ 그리움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통처럼/ 온몸을 쑤신다/ 널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왜 가슴 터놓고 하지 않았는가/ 생각만 있고 그 흔한 장미 한 송이/ 보낼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마저 비워둘 걸/ 하고픈 말 다하고 살 순 없지만/ 오늘/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날/ 이 세마디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사랑한다"/ "지금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퇴근길 오후에 / 박건삼

하지(夏至)를 하루 앞둔/ 1995621일 퇴근길/ 비는 오락가락하는데/ 아파트 입구 한 귀퉁이/ 한뼘만한 공간에/ 알록달록한 '잡표' 신발을 팔던/ 쉰두어살 쯤된 아줌마가/ 애잔한 하루의 삶을 거두고 있었다.// 검은 콩 한 됫박에/ 산나물 두어 묶음/ 두부 몇 모를 팔던 할매는/ 오늘따라 어딜 갔을까?/ 할매가 없는/ 아파트 입구 그 자리에/ '나이키''아식스'/ '리복'도 아닌/ 이름모를 '잡표' 신발을 파는 아줌마는// 비내리는 하늘을 원망하듯/ 서러운 전()을 거두고 있었다.// TV 저녁 뉴스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동포에게/ 15만톤의 쌀을 가져 준다는데/ 이렇게 옹색한 이웃의 삶엔/ 우리는 왜 이토록 무심탄 말인가?/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나/ '잡표' 신발을 파는 우리 아줌마도/ 내핏줄 내동포인데/ 비내리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잡표' 신발 아줌마의 눈빛이 서럽다// 얼마를 팔았을까?/ 쌀 두어되 사고/ 막내놈 풀빵값이나 벌었을까?/ 지친 하루를 소매하고/ 삶의 전()을 거두는/ 체념의 눈빛 속엔 북녘땅으로 실려갈/ 15만톤 쌀부대가 어린다// 그래/ 우리 모두/ 인도주의/ 휴머니즘에 박수를 보내자/ '정치가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 네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자/ 그리고 15만톤/ 150만톤/ 1500만톤이라도 나누어 먹자// 비오는 퇴근길 오후/ '잡표'신발을 파는 아줌마의 삶에서/ 나는/ 서글픈 인도주의에 목이 막힌다.//

 

별도 눈물을 흘린답니다 / 박건삼

'보고 싶어요'/ 편지는 단 한 줄뿐이었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열 번 스무 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열 마디의 말보다/ 보고 싶다는 그 한 마디가 절절히 다가오는 건/ 진실된 사랑을 가장 함축있게 담았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읽고 하늘을 쳐다보니/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별들이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아니 보고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겠습니다'// 보고파요 보고파요 애원했지만 메아리는 흔적조차 없이 푸른 하늘 속으로 숨어 버립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랑은 없다지만 그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어찌하나요//

 

변명 / 박건삼

'이른 봄/ 얼음장 밑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비로소/ 아득히 먼 기억 속에 숨어 있던/ 네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 편질 써 두었다// 삶이란/ 칼날 같은 예리함보다/ 때론/ 무디어질수록 편안한 신경통처럼/ 세상사 그저 외면하고/ 팔베개를 하고 눕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도/ '큰 강물은 흐르는 소리가 없듯이/ 깊은 사랑 또한 소리가 없는 법'이라/ 푸른 하늘 아래/ 부끄러운 변명을 하며/ 아직도 편질 부치지 못했다//

 

마음 / 박건삼

예전에/ 나는 마음은 그저 둥근 공간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가 내 마음의 창가에 다가와/ 조용히 문을 두드렸을 때/ 마음은 호숫가 별장의 전망 좋은방 이었다./ 라일락 향기가 온몸을 휘감고/ 뜨거운 입맞춤/ 숨가빴던 열정의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엔/ 텅빈 외로움만 파도처럼 일렁일뿐/ 그리움은 뵈질 않았다./ 사랑은 결국 떠난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영원히 곁에 둘수 있는 사랑은 없는데...// 이제 비로소/ 나는 마음은 외로움으로 가득 찬/ 텅빈 허무라는 걸 알았다.//

 

유월은 / 박건삼

라일락 꽃향기 사라지고/ 아카시아 흰 꽃 늦은 봄바람 불어/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면/ 계절의 여왕은 당신의 포로/ 갓난아기 손같은 은행잎이/ 백일 지난 아기의 웃음으로 퍼지면/ 연두빛은 초록으로 달려가고/ 파도가 꿈꾸는 철 이른 바닷가엔/ 이중섭의 유화 속으로 개헤엄 치는 아이들이 즐겁다// 진달래 꽃 필 무렵에 오마던 그 약속이/ 오월 단오 창포 꽃 하도록 가뭇없는데/ 설레며 살아온 계절, 탓한들 한번 가버린 님이 올까만/ 붉은 꽃잎 떨어진 오후/ 애잔한 열정을 유혹하는 당신은/ 차라리 장미의 붉은 입술이다// 첫 소나기 지나간 오후 무지개 걸린 산하/ 반쯤 먹다 남은 솜사탕 같은 구름 한 점 산허릴 휘감고/ 찬란한 유혹으로/ 잃어버린 청춘을 꼬드기는 당신은/ 오만해도 아름다운 이름/ 모란꽃이 피면/ 어디선가 성미 급한 매미가 파도를 부르고/ 황포돛배가 사라진 무심한 한강 위로 유람선이 흐른다// 유월이여!/ 당신은 얼마나 큰 마법의 가슴이길래/ 계절의 여왕을 포옹하고 구룡포 가는 길/ 노고지리 치솟는 오월의 푸른 보리밭을/ 저리 고운 황금빛으로 바꿔/ 꿈꾸는 푸른 바다마저 춤추게 하느뇨.//

 

하찮은 일들에 대한 바람 / 박건삼

아침마다/ 네게 전화를 거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네 목소리를 듣고/ 기다림의 거리를 가늠하고자 함이오// 해질 무렵/ 널 인사동 목로주점에서 만나자는 건/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 초롱한 눈망울에서/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자 함이다// 오늘/ 비 내리는 밤/ 네게 편지를 쓰는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빗속에/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함께 젖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찮은 일/ 작은 일들이 모여 하루를 이루나니/ 그대 있음에/ 산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치 않겠다//

 

이름 없는 별들 / 박건삼

밤하늘 그 무수한 별들 가운데/ 이름 없는 별들이 더 많은 까닭은/ 돈과 힘으로 세상을 윤기 있게 살다간 사람 보다/ 자신을 낮춰 이름 숨기고 그늘에서 몰래 살다간/ 백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북극성은 하나로 족하지만/ 은하수 없는 밤하늘은 얼마나 삭막하며/ 가슴으로 떨어지는 별똥별은/ 얼마나 가슴 벅찬 추억 이었던가/ 오늘 밤 나는/ 차라리/ 밤하늘을 밝히는 이름 없는 별이 되고 싶구나.//

 



 

박건삼 시인은 1943년 경북 김천 출생해 경북고, 한국외국어대 정외과와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KBS 공채 1기 PD, 라디오 및 TV 예능국 PD, MBC 기획특집부장, SBS국장 방송위원회 연예오락심의위원장, 국악방송 PD 역임.
방송사 PD로 이름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유난히 사랑에 관한 시가 많은데 그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소리 내어 밖으로 드러내는 시를 많이 썼다. 느지막이 시를 시작한 그의 시에는 유년의 기억을 더듬고 세월의 무상함과 덧없음. 사랑의 여운과 여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들어난다. 시집 “지천명에도 사랑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바람 탓만은 아니다” “세 가지 그리운 풍경”외 ‘PD 길라잡이’, ‘예순여섯에 카미노를 걷다’, ‘가끔은 향기 나는 사람이 그립다’ 등의 저서가 있다.

 

[월간조선, 2012.4월호] 프랑스·스페인의 카미노 800km, 고행의 길, 감동의 길 / 글·박건삼

⊙ 걷는 거리 : 817km
⊙ 걷는 시간 : 약 1개월
⊙ 코스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사이군~푸엔테라레이나~생장 피에 드 포르
⊙ 난이도 : 조금 힘들어요
⊙ 좋은 계절 : 봄·여름·가을

누가 내게 꼭 걷고 싶은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카미노를 추천하겠다. 가장 외롭고 쓸쓸하며 때론 달콤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이다. 다만 카미노는 돈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내일, 모래, 이렇게 미루다 보면 평생 갈 수 없는 게 카미노다. 그래서 월급쟁이들에겐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과감히 탈출,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어 ‘조르바’처럼 자유인으로 단 한 달만이라도 살아 볼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다. 진정한 선택이란 ‘일상과 자유’ 둘 중 어느 것 하나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나는 4년 전, 2008년 4월 27일부터 5월 29일까지 32박33일 동안 ‘카미노’를 걸었다.

이 고달프고 외롭고 쓸쓸한 행복을 즐겼다는 건 인생의 후반에 내가 택한 분명히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카미노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피레네를 넘어 산티아고까지 걸은 사람과 아직도 걷지 않은 사람이다.” 카미노를 걷고 난 후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카미노란 무엇인가?

‘카미노’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순례 길 800km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일컫는데 이를 줄여서 ‘카미노’라 부른다.

카미노는 대략 12개의 길이 있다. 그중에서 프랑스 남쪽 지방 ‘생장 피에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800km 순례 길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데 이 길은 순례객의 85% 이상이 이용하는 프란세스 길이다. ‘생장’을 제외한 나머지 길은 모두 스페인 서북부 지방을 따라 걷는다. 태양과 맞서 걸어야 하는, 그늘 한 점 없는 해발 800m 고원지대인 ‘메세타’ 지역이나 인간이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게 갈리시아 지방의 비다. 그러나 카미노를 다녀온 사람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 길은 고행의 길이자 동시에 감동의 길이다. 카미노는 버리러 가는 길이다. 많이 줄이고 보다 많이 버릴수록 행복해진다.

카미노 여정은 생장에서 출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크레덴시알(순례자 수첩)을 제출하고 증명서를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다시 서북부 땅끝 마을 피스테레(Fistirre) 등대까지 87km를 3일 동안 걷거나 버스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각자 소지한 귀중품(주로 내의나 양말, 심지어 스틱까지)을 하나씩 태우는 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가톨릭 신도들은 이곳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시아(Muxia)나 파티마(Fatima) 같은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고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포르투갈의 쿠임브라(Coimbra)나 리스보아(Lisboa)를 거쳐 ‘파두(Fado)’ 공연을 보고 마드리드를 경유해 귀국한다.

배낭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마더 테레사님은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같은 여정’이라 했다. 카미노 길 내내 매일 매일 낯선 알베르게(Albergue·순례자 쉼터)에서 잠을 잔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건 침대와 베개뿐이다. 따라서 카미노에선 이불을 대신하는 침낭이 필수 장비다. 한 달 이상 걷는데 짐은 가벼워야 한다.

첫째, 배낭이 가벼워야 하고, 둘째 배낭에 넣는 물건이 적어야 하고, 셋째 넣는 물건 자체가 가벼워야 한다.

우선 350g짜리 가벼운 침낭을 준비한다. 역시 가벼운 판초 우의 한 벌, 옷은 입고 있는 외에 기능성 제품의 바지 하나와 긴 팔(또는 반 팔 각 한 벌) 티셔츠, 내의 상하 한 벌씩, 양말 한 켤레, 스포츠타월 한 장, 세면도구, 세탁용 물비누(빨랫비누는 카미노길에서 50센트만 주면 구입 가능), 옷핀(양말 건조 시 필요) 네 개 정도, 약간의 비상약(해열제, 지사제, 소염진통제 등 모두 합쳐 200g 이하)과 발에 바를 바셀린(50g 정도. 모자라면 카미노 여정 중 마을의 약국에서 언제든지 살 수 있다), 그리고 바르는 소염진통제를 추천한다.

그리고 꼭 가져가야 할 책 한 권(나는 시집 한 권을 지니고 다녔다), 필기용 수첩, 가벼운 샌들, 작은 손전등 하나(나는 무게 100g 정도의 헤드랜턴을 사용했다)면 족하다. 여기에 배낭에 부착하는 것은 생장순례자협회에서 받은 조가비 하나뿐이다.

순례자 통행증인 ‘크레덴시알’과 여권, 돌아오는 항공권, 그리고 약간의 유로화는 배낭 속의 비밀창고에 잘 보관해야 한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지금 당장 필요 없는 비상약이나 물품을 챙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지금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은 아예 버려야 한다. 여성들은 7kg 이내로, 남자의 경우라도 절대 10kg을 넘지 않도록 배낭을 꾸려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기가 입은 옷 외에 배낭엔 절대 두 벌씩 넣지 말아야 한다. 매일 빨래하는데 왜 두 벌씩이나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하는가. 햇볕이 좋아, 게다가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면 빨래는 두어 시간이면 뽀송뽀송하게 마른다. 덜 마르면 옷핀에 꿰어 배낭에 달고 몇 시간 걸으면 마른다. 그래서 옷핀이 필요한 것이다. 적게 가져가라. 카미노는 버릴수록 행복해진다.

갈리시아 지방은 꼭 걸어라

갈리시아 지방의 비를 피할 수 없지만, 꽃과 잎의 계절인 4~5월과 풍요로운 9~10월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걷기에 편안한 계절이다. 특히 5월 스페인 카미노의 햇빛과 바람은 매혹적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갈리시아 지방은—오 세브레이로에서 사리아, 포르토 마린, 아르주아를 거쳐 산티아고까지—한 곳도 빼놓지 말고 전 구간 110km를 반드시 걸어야 한다. 단 한 곳도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면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주는 완주증명서를 받을 수 없다. 800km 전 구간 중 다른 곳은 걷지 않고 갈리시아 지방 110km만 걸어도 완주증을 준다. 이 점 꼭 명심하고 걷기 바란다.

카미노의 안전, 숙식, 도중 생리현상 처리 등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100% 안전하다. 자기 페이스대로 시속 4km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걸으면 된다. ‘명상은 발끝에서 나온다’고 한다.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스스로 풍경으로 들어가 자신이 그 풍경의 일부가 될 때쯤엔 카미노는 자유로워진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행복해진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그런 빛깔의 하늘 아래 지평선을 이뤄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 길,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 처절하고 고독한 이 풍광은 메세타 지역이 아니고는 도저히 맛볼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시인처럼 푸른 하늘에 우물을 파 그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이라도 적시고 싶었다.

카미노의 5대 풍광

나에게 카미노 5대 풍광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 피레네의 숨 막히는 몽환적인 절경을 꼽고 싶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잠시 소풍 나온 내가 어느 날 문득 피레네에 서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이었던가! 두 번째로, 카리온에서 칼자디아로 가는 17.2km의 메세타 길이 끝없이 펼쳐져 숨이 탁 막히는 밀밭의 지평선, 세 번째로 ‘크루즈 데 페로’ 철 십자가와 돌무덤에 돌을 올리고 저마다 한 가지씩 소원을 빌고 아르고 산을 넘어 아세보로가는 두어 시간여 동안의 들꽃축제 길, 네 번째로는 절대 고독과 절대 적막이 맞닿아 있는 오 세이브레이로(O Cebreiro)로 가는 하늘 길에서 듣는 천상의 ‘바람 소리’와 1300m 정상에 펼쳐지는 풍광을 꼽고 싶다. 파울루 코엘류가 그의 자전적 소설 《순례자》에서 ‘죽음의 길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술회한 바로 그 길이다.

마지막으론 갈리시아 지방의 떡갈나무 숲과 안개다. 유독 비가 많은 갈리시아 지방–비에 젖은 길–은 쇠똥이 진창을 이루기도 하지만 안개가 떡갈나무 숲을 헤집고 들어와 뺨에 입맞춤하고 스쳐 지나갈 때 그 부드러운 촉감은 첫 키스보다도 황홀하다. 게다가 카미노에서 마주치는 야생 양귀비꽃의 유혹은 자못 고혹적이다. 카미노는 분명히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름다운 감동의 길이기도 하다.

‘카미노를 왜 걷는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다만 그냥 걸었을 뿐이었다. 함께 걸으면서도 인간은 영원히 홀로인 존재임을 깨달았다.

인간은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그러나 생의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정직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걸었다. 후회 없이 걸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예전엔 볼 수 없던 것을 보았다.

살아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고 가장 행복한 여행을 나에게 꼽으라면 단연 800km ‘카미노 순례길’이다. 눈만 뜨면 신발끈 졸라매고 걸었다. 바나나 한 개, 요구르트 하나, 빵 한 덩이. 이 소박한 식단이 아침식사의 전부다. 32박33일 동안 걸으면서 참으로 정직한 순간을 맛보았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정말 행복했었다. 이 긴 여행, 순례 길은 어떤 종교와도 상관없이 지금껏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는 거대한 초록파도의 물결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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