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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현승 시인

부흐고비 2021. 2. 6. 11:24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고독의 순금純金 / 김현승

하물며 몸에 묻은 사랑이나/ 짭쫄한 볼의 눈물이야.// 신도 없는 한 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왔기에/ 흙 속에 별처럼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처럼 썩지 않으련가.// 그러나 모르리라./ 흙 속에 별처럼 묻혀 있기 너무도 아득하여/ 영원의 머리는 꼬리를 붙잡고/ 영원의 꼬리는 또 그 머리를 붙잡으며/ 돌면서 돌면서 다시금 태어난다면,//


일 년의 문을 열며 / 김현승

금을 캐는 광부가 부자는 아니고/ 전복을 따는 해녀가 반드시/ 전복을 배불리 먹지도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살림도 이렇듯 흐를 데로/ 흐르고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회의사당 앞 오월의 플라타너스들이/ 시청 지붕 위 푸른 비둘기 떼가/ 날아와 앉던 오월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십일월의 짙은 서리에 무겁게 떨어질 때,/ 우리의 마음들도 낡은 경험 위에/ 새로운 지혜를 쌓아 올려야 했다./ 그 꼭대기에는 민권의 깃발이 향수처럼/ 휘날리는…// 화려한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하듯,/ 우리는 다시 고요한 새벽과 같은/ 고요한 일 년으로 돌아가서/ 질주하는 역사의 대낮을 맞아야 했다./ 어지럽고 가난한 나라의/ 아직은 회복된 건강의 연약한 일 년―// 그러나 소풍길에 나선 아이들이/ 룩샥을 메고 북악산(北岳山)의 새벽 구름을/ 바라보듯/ 낙동강 공업지구의 가동하는 기계 소리를/ 주민들이 귀담아 듣듯/ 광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기관차에/ 불붙는 석탄을 집어 넣듯,// 우리는 일년의 문(門)을 열고,/ 핏대와 희망과 엇갈린 의견으로/ 윤기 있게 때 묻은 일 년의 문(門)을 열고/ 우리의 길들을 찾아 햇발처럼 쏟아져 나간다./ 차도와 보도를 가려 디디며/ 질서와 자유의 화려한 길을…//

절대신앙 / 김현승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 / 김현승

온 세계는/ 황금으로 굳고 무쇠로 녹슨 땅,/ 봄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고/ 새소리도 날아왔다/ 씨앗을 뿌릴 곳 없어/ 날아가 버린다.// 온 세계는/ 엉겅퀴로 마른 땅,/ 땀을 뿌려도 받지 않고/ 꽃봉오리도/ 머리를 들다/ 머리를 들다/ 타는 혀끝으로 잠기고 만다!// 우리의 흙 한 줌/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가슴에서 파낼까?/ 우리의 이슬 한 방울/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눈빛/ 누구의 혀끝에서 구할까?// 우리들의 꽃 한 송이/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얼굴/ 누구의 입가에서 구할까?//

 

프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홀로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金顯承(1913.2.28.~1975.4.11.)

호는 남풍(南風)·다형(茶兄).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생. 목사인 부친의 전근을 따라 평양(平壤)에 이주, 그 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가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1934)됨으로써 시단에 데뷔하여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 《황혼》 《새벽교실》 등을 계속 발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나타내어 주목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흡(朴洽)·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신문학(新文學)》(계간)을 6집까지 발행,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8년에 제3시집 《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 《절대고독》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띠었으나, 8·15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보여 주었고, 말기에는 사랑과 고독 등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1973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선집》을 출간했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 《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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